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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0

하늘의 별과 땅의 별

Editor.윤성근

『한밤이여, 안녕』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진 리스Jean Rhys의 이 재기 발랄한 소설은 줄곧 밤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에 대한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다. 딱 한 번 그런 장면이 있다. 그냥 별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별이다. 주인공 사샤와 친구들은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별을 올려다본다. 사샤는 그 별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여기서 잠깐, 잠시 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은 약장수 같은 기질이 있어서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중간에 딱 끊고 내 얘기 하는 걸 즐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말기를. 이 또한 주인공 사샤와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
나는 어릴 때 별이 잘 보이는 동네에 살았다. 강원도 태백. 그 아래 ‘황지’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황지는 작은 동네라서 해가 지면 가로등 몇 개만 희미하게 남을 뿐 사방이 어둡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암흑세계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밤하늘을 가득 덮고 있는 별 때문이다. 별이 얼마나 많은 지비가 오는 흐린 날이 아니라면 밖은 제법 환했다. 황지에는 언제나 물이 퐁퐁 솟아나는 작은 샘 ‘황지연못’이 있다. 나는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물 위에 비친 별을 보러 황지연못에 갔다. 연못이 워낙 맑아서 별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안에 우주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과장이다. 내가 그때 우주라는 게 뭔지 알 턱이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중요한 것 하나는 알았다. 검은색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하얀 별이 있다는 사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별은 하늘 위에 매달려있는 것일까, 아니면 점점이 박혀있는 것일까? 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밤에만 나오는 것일까? 한참 동안 연못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서울로 이사 올 즈음엔 어떻게 하늘에 별이 둥실둥실 떠 있는지 아는 나이가 됐다. 별은 하늘에 매달려 있거나 박혀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와 같은 천체들이라는 사실을 배웠을 땐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실망했던건 다름이 아니라 도시에선 별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그 많은 별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음이 지치고 삶에 힘을 잃었을 때, 수십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별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하지만 별은 인간이 만든 휘황찬란한 불빛에 가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도시생활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서먹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한밤이여, 안녕』에 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에게 사샤라고 불리는 주인공 소피아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파리의 누추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자이다. 소설 속 배경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열기가 한창이던 그해 늦가을 무렵이다. 전체주의가 극한을 달리던 당시 유럽 사회에서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샤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유형의 불운한 인간이었다. 사샤는 밤이 되면 술을 마신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그저 그렇게 취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뿐이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도시의 밤은 곧 파티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에 둘러 싸인 방에서나 겨우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사샤에게 밤은 자신의 삶처럼 막막하고 깜깜한 암흑이다. 그녀의 방 커튼은 항상 닫혀있고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는 건 창밖에 빛나는 별이 아닌 벽에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버거운 사샤에게 만국박람회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친구들 손에 이끌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람회장을 찾는다. 거대한 박람회장 중간에는 우뚝 솟은 별 하나가 있다. 그 이름은 ‘평화의 별’. 그러나 사샤는 그 커다란 인공별에서 평화는 물론 희미한 별빛 하나 발견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어째 저리 빈약하지. 천하게 보이네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수많은 사샤들이 존재한다. 시대는 변했어도 여전히 곳곳에 천박한 평화의 별을 세워놓고 사람들에게 저 별을 보라고 광고한다. 내 마음에도 사샤가 살고 있다. 나는 인공별이 아닌 진정한 별을 보기 위해 과감하게 커튼을 열어젖힐 것이다. 수십억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빛을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내 마음속 불운한 사샤도 가끔은 반짝거리는 위안의 미소를 보내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