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17

풍요로운 가을과 딱 어울리는 책,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Editor. 지은경

농사에 관한 작은 잡지를 만들며 만났던 농부들을 보고 자신이 놓치고 있는 본질이 무언지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것을 내려놓을 마음도 없는, 즉 이도저도 아닌 경계선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 있는 것 같아 심장이 자주 벌렁거린다.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동네

하루키 소설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내는 장소와 공간에 무척이나 가보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단조롭고 재미없게 묘사되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야기 속 장소들은 특유의 혼을 가진다. 또 주인공이 만드는 간단한 요리를 먹고 싶게 하며 그가 듣는 음악에 대해 알고 싶게 한다. 말도 안되는, 예를 들면 이 책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얼굴 없는 사나이’가 깊은 존재감으로 등장하는데 이 역시 만나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 얼굴 없는 사나이를 그려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각자의 상상 속, 현실이 묘사할 수 없는 형상인지라 영화 속에 등장한다면 그 감흥은 확 떨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선 과거에 있었던 실제 사건들도 등장하는데 특히 일본이 감추려 하는 과거 만행 중 하나인 난징대학살에 대한 내용을 매우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일본 언론과 보수 단체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며 “저질 매국노이자 수준 이하”라고 말했고 이에 하루키는 “역사를 아무리 다시 써도 결국 다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이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조차 인정할 만큼의 사죄”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대표해야 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소신뿐이라고 밝혀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준다. 작가로서 사회를 향해 자신과 자신의 글의 무게로 맞서는 하루키, 아마도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하루키를 닮고 싶고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이겠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오랜만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돌아왔고 여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존재는 역시 하루키의 얼굴이다. 즉 다시 하루키와 긴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기쁨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직업으로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은 어느 날 느닷없이 아내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아내는 이유도 묻지 말라 하고 주인공 역시 그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간단한 짐과 오래된 자동차만 챙겨 집을 나갈 뿐이다. 현실 같았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몇 달간의 여행 끝에 그가 돌아온 곳은 한 대학 동기의 아버지가 기거하던 시골, 산꼭대기의 작은 집이다. 집주인은 일본 전통화를 그리던 이름있는 화가였으나 치매가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기에, 주인공은 빈집을 관리해 줄 겸 지내도 괜찮다는 친구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그리고 지친 그의 일상은 이곳에서 한동안 평화롭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여기서 그는 오래된 집의 안팎과 시골 동네, 그리고 건너편에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저택 등을 묘사하는데 이 또한 왜인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과는 달리 조용하게 졸졸 흘러가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모험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집주인인 화가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그림을 숨겨진 다락에서 발견하고부터 그에겐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는 오묘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심경을 묘사하던 문체는 그 톤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실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읊조린다. 또한 주인공이 집주인 화가이자 친구의 아버지인 도모히코라는 대상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발견해가면서 이야기는 더없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흔히 그렇듯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품게 되는 의문들 몇 개는 쉽사리 베일을 벗지 않는다. 그러한 답답함은 바로 궁금증으로 이어지고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듯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딘지 마음이 치유 받는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치유도 딱 거기까지다. 이야기는 점점 미궁 속으로 흐른다.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가자 집 뒤의 돌무덤을 발견하고, 도모히코의 그림 속 칼을 맞아 죽어가던 기사단장이 실제로 나타난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과거 역사의 사건들, 그리고 여전히 소소한 불협화음의 갈등 구조를 지니고 덤덤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종합적으로 이루어내는 이야기 세계에 빠져보자. 생각의 폭이 풍부하게 확장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