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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9

평등하게 같이 살기

Editor. 최남연

여름이면 제습기, 겨울이면 가습기를 틀며
집안 습도를 관리하기 바쁜 7년 차 자취인.
극세사 이불, 그냥 이불, 여름용 홑이불까지 필요한
한국의 사계절 너무 싫어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황선우, 김하나 지음
위즈덤하우스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자리가 생기면, 사소한 호구 조사(?)를 마친 다음 몇 가지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다 보면 꼭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을 받는 순간이 온다. 나는 5년 넘게 만나는 중인 사람이 있다고 대답한다. 상대는 놀라며 묻는다. “결혼 안 해요?”
오랜 연애 중이고, 나이가 그리 어리지 않으면 대부분 결혼을 마땅한 다음 단계로 도출해낸다. 외로이 홀로 늙어 죽는 것보다야 마음 맞는 사람이 옆에 있어 밥도 함께 먹고, 아프거나 힘들 때 서로 버팀목이 되어 준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같이 살면 재미있겠다 싶지만, 양가 부모님이 껴버리는 결혼은 심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나의 선택지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둘이서 이미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이젠 마냥 만나 데이트하면 그만인 시절은 지났고, 슬슬 다음 단계(예컨대 각자 매달 수십만 원의 월세를 내며 계속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이번 집 계약이 끝나면 다음엔 집을 합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지점에 다다랐는데, 집을 합친다면 나의 미래는 뻔했다. 청소로 스트레스를 풀고 계절이 바뀌면 옷이며 이불을 싹 정리하는 나와 달리 나와 만나는 그분은 5년째, 꾸준히, 빨래를 넌 뒤 개는 일이 절대 없고 마르는 대로 하나씩 집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습관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는 데다가, 안 그래도 집안일은 으레 여자 몫으로 치부되니 이대로라면 나는 여생을 집안일과 함께 보내게 될 판이었다.
그러던 차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만약 남자친구와 집을 합친다 해도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 어떻게 하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서로 존중하며, 또 집안일을 잘 나누어 평등하게 살 순 없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사회의 요구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심지어는 여자 둘이 집을 사서(!)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는 구미가 당겼다.
카피라이터이자 작가 김하나와 패션지 에디터로 일하던 황선우는 SNS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됐으며, 실제로 만났더니 취향이 맞고 대화가 잘 통했다. 마침 둘 다 오랜 혼자 생활에 지쳐 있던 때라 결론적으론 함께 망원동에 집을 샀다. 이 둘은 나와 남자친구처럼, 한 사람은 자타공인 정리꾼에 한 사람은 ‘맥시멀리스트’ 다. 후자인 황선우가 어느 정도로 물건을 끌어안고 사는가 하면 아래와 같다. (글쟁이 둘이 쓴 이 책의 뛰어난 글발과 재미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요즘 욜로YOLO라는 말들을 하는데, 황선우의 냉장고를 열어보면 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진짜 순혈 욜로다. 다음에 냉장고를 열 스스로를 배려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인생은 짧고, 당신은 인생을 단 한 번 살 뿐이다. 문을 열고, 우유와 햄 사이에 2.5cm 정도의 틈이 보이면 맥주캔을 그 틈에 어떻게든 욱여넣고, 서둘러 문을 닫는다.
반면 김하나는 설거지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정반대의 인간이다. 프리랜서로 일해 집에 오래 있다 보니, 자연스레 보이는 사람이 치우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자 김하나는 집안일을 많이 했다 싶은 주에는 황선우에게 가사 비용을 청구했다. 아니면 이 둘은 도우미를 불렀다. 보통의 부부 사이였다면 이런 시원한 해결책이 가능했을까? 아마 집 치우는 일은 당연히 여성이 무상으로 도맡는 영역으로 치부됐을 것이다. 이외에도 김하나와 황선우는 좋아하는 것이 잘 맞아 무려 집을 사 같이 살기로 했지만, 동시에 서로 너무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고, 중간 지대를 찾고, 그러면서 나 자신의 모양도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타인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다.
남들이 살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닌, 우리들만의 방식대로 사는 이야기가 궁금한 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지, 또 두 사람이 어떻게 일상을 꾸려나갈 것인지는 결국 당사자의 손에 달렸다. 결혼하지 않고도, 여자 둘이서도, 혹은 여자와 남자도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그 상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돕는 용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 둘이서 어떻게 집안일을 나눌지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