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19

파이 이야기

Editor. 최남연

괜찮은 책이 나오면 일단 사고 보는 출판업게 큰손.
한 권에 3만원이 넘는 여성학 고전 다수 보유.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김진아 지음
바다출판사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돈이며 시간을 들여 책 한 권을 읽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내 경우, 독서의 목적은 경험 도둑질(?)이다. 작가의 경험이며 지혜는 물론이고,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착오’ 부분은 버리고 ‘시행’ 부분만 날름 흡수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책값 만 얼마쯤은 정말 저렴한 셈이다.
어쨌든 귀동냥이 아닌 눈동냥(?)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은 내가 생각하는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인데, 그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길을 먼저 걸어간 저자가 쓴 책이 나오면 가급적 읽어본다. 그러니까, 여성 저자의 책이면 읽어본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20대 중반의 여성으로서 나는 30대, 40대가 되면 내 앞에 어떤 모습을 한 길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지난 4월에 나온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역시 이런 호기심에서 집어 든 책이다.
저자는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대구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지만, 교육열 높은 부모님 덕분에 대학을 서울로 올 수 있었고 광고 회사에 들어가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외모와 다이어트, 연애에 시간을 쏟다 뒤늦게 페미니스트가 돼 탈혼(脫婚)을 거쳐 한남동에 여성만을 위한 공간 ‘울프소셜클럽’의 문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목격한 유리 천장, 경력 단절, 성별 임금 격차,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결혼 제도, 성매매와 접대 문화 등은 사실 나에겐 딱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여성운동은 파이를 되찾는 투쟁,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라는 부분만은 마음에 남았다.
여자라고 더 착하거나 도덕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건 여성이 사회적, 육체적 약자로서 권력에 더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부도덕해질 수 있다. 남자만큼 혹은 남자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평화주의가 아니며 도덕성 투쟁이 아니다. 남자들에게 빼앗긴 여자 몫의 파이를 되찾는 투쟁이다.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다.
여성학 공부를 막 시작해 개론 수업을 듣던 때, ‘여자의 적은 여자다’를 비판해보라는 문제가 시험에 나왔다. 당시 나는 여자의 적이 여자면 남자의 적도 남자고 우리는 모두 서로 적인 것이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논조로 패기만만한 답을 적었는데, 시험 후 발표된 여러 개의 모범 답안 중 하나는 이런 내용이었다. “위 주장은 여성에게 더 적은 파이가 할당되어 있는 사회 구조는 은폐한 채, 그 적은 파이를 나누어 가져야만 하는 여성 간 경쟁 구도만을 부각시킨다.”
이때는 사실 ‘파이’가 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유·무형의 재화라거나 기회 같은 것이 아닐까 속으로 짐작만 했다. 자원이나 기회쯤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파이’라는 말은, 좀 비약해 얘기하자면 결국 각자의 통장에 들어가는 ‘소득’이 아닐까 싶다. 밥그릇을 채워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그래서 홀로 설 수 있도록 하는 돈과 경제력.
김진아는 『자기만의 방』을 쓴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따 자신의 카페 이름을 ‘울프소셜클럽’이라고 지었는데, 1929년 나온 이 책은 “여성이 글을 쓰려면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유명하다. 김진아 역시 책에서 고민 없이 이혼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소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쓴다. 또, 가장breadwinner의 자리를 비워두지 말고 혼자 산다면 세대주로서의 감각을 길러보라고 조언한다.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면 뜬금없는 마무리일까?아니면 인류를 구할 게 아니라, 나는 그저 내 ‘파이’를 구할 뿐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맞힌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