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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1

태초에 이별이 있었다

글.최재천

SF 전문출판사 아작 편집장.“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_ 조 월튼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전삼혜 지음
문학동네

사랑이 먼저일까 이별이 먼저일까를 묻는다면 누군가는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웃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태초에는, 분명 사랑보다 이별이 먼저 존재한 것 같다. 전삼혜 연작 소설집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단연코 나는 이 문장을 택하고 싶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서로 멀어졌다.”
진정한 사랑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바로 이별의 세계다. 연작소설 혹은 장편소설로 확장되기 전, 전삼혜가 단편 「창세기」를 통해 선보인 제네시스의 세계 역시 사랑보다 이별이 앞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다시 엮인 등장인물들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장대한 이별연습에 가깝다.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문라이터’를 통해달을 광고판으로 쓰는 회사 ‘제네시스’에 소속된 ‘제네시스의 아이들’ 이야기다. 달을 광고판으로 쓴다니. 70년 전에 로버트 A.하인라인이 발표한 「달을 판 사나이」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달을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 D. D. 해리먼 씨가 이후 포식자적인 우주 개발의 선두에 선 것과 대조적으로, 달 광고판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버는 ‘제네시스’는 소행성 충동을 막고 지구를 살리느라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20세가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 소설은 그 아이들의 이별 이야기다. 혹은 그래서 사랑 이야기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데는 사실 큰 이유가 필요치 않다. 그저 머리카락 색이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고, 자신의 눈동자색을 처음으로 궁금해해준 사람이어서일 수도 있고, 마치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 오리처럼 부모와 다리를 잃은 자신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별을 하는 데에는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별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이별을 통해 너와 나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이별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모든 ‘너’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거대한 폭발, 빅뱅을 시작한다.
이처럼 이별과 사랑은 사슬처럼 이어진다. 오랫동안 청소년들을 위한 SF를 써온 작가 전삼혜의 이 소설은 이별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을,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소행성 충돌을 앞둔 혼돈의 시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한다. 그 방식은 사랑하는 이를 안전한 곳에 몰래 보내는 일일 수도 있고, 도서관에서 책 두권을 빌려 오고 우유를 사 오는 일상일 수도 있고, 그저 행운을 빌어주는 기도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바람은 조금 더 따듯하고 간절하다.
“이 말을 누군가와 나눴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나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팽창하지 않는 우주라니.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주는 이미 멀어지기 시작한 것을 어쩌겠는가. 말할 수 없이 넓은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곁을 내어주는 일이다. 2015년 발표 이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 온 「창세기」의 문장 그대로.
“너는 나의 세계였으니, 나도 너에게 세계를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