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 특별기획

책과 나무를 품은 비밀 정원, 펠리산느 미디어 도서관

에디터. 서예람 사진. Dominique Coulon & associés © Eugeni Pons

“어릴 때 나는 위험이 잔뜩 도사리는 숨 막히는 모험을 꿈꾸었지만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찾지 못했지요! 그래서 결국 그런 문은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어요.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서 고전적인 세계에 만족했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소설을 쓰면서 모험의 흥취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개성이 넘치고, 놀라운 존재들이 등장하며, 이상한 도시들을 누비는 모험이죠. 마침 내 그 문을 찾아낸 겁니다.” _피에르 보테로, 인터넷서점의 저자 소개 중(태일소담출판사 제공)
피에르 보테로Pierre Bottero는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다수 집필한 프랑스의 소설가다. 갑자기 웬 작가 소개냐면, 이달에 소개할 도서관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펠리산느 시에서 대부분의 생을 보냈고, 자신이 졸업한 펠리산느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에윌란의 모험’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던 작가다.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는 답변은 어쩐지 이 도서관에도 맞아떨어진다. 우선 말 그대로 멋진 문이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서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 되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펠리산느 시는 오래전부터 군사 건물과 요새가 있던 마을로, 역사적 유산으로 여겨지는 건축물들이 많은 동네다. 시내 중심에 있던 모로 메종Maureau Maison이라는 아담한 집 역시 1642년도에 군용으로 만들어진 건물 중 하나다. 집 옆에 붙어있는 공원과 함께 이 집은 작년에 어린이를 포함한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미디어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높지 않은 오래된 건물 옆 에 낮고 길게 세워진 새 공간이 들어섰다. 오래된 것과 새것, 수직의 건물과 수평적 공간의 조화는 시각적으로 편안하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들이 놓인 녹음이 짙은 공원과 새로 지어진 건물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굵직한 나무들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선 낮은 신관은 앞뜰에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품는 듯 우묵한 곡면 구조로 지어졌다. 원래 있던 나무를 최대한 보존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건축계 혹자들은 이 설계를 ‘유기농organic’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과 작물보다 훨씬 오랫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흙에 비료나 인공적인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농법을 동적,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저런 건축 디자인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싶다. 건물의 생김새만이 아니라 내부를 이루는 재료들도 건물 안팎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한다. 커다란 통창은 초록과 따사로운 햇볕, 일렁이는 나 무 그늘을 향하고 있어 자연의 움직임이 도서관 안으로도 그대로 타고 들어온다.
공간을 좀 더 가까이에서 둘러보면, 1층의 통창으로 바깥이 훤히 보이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와서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다. 마치 벽이 없는 것처럼 공원을 향한 시야를 활짝 열어주는 공간이다. 건물의 가장 위층인 2층에서는 자연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곡면 공간에 놓인 의자에서는 플라타너스의 굵직한 줄기와 가지가 자세히 보인다. 마치 지붕처럼 드리우는 나무 그늘의 존재감을 흠뻑 만끽하기엔 역시 2층이 좋겠다. 녹색 집기나, 나무와 비슷한 결의 계단과 문틀로 꾸며진 도서관 내부는 바깥의 공원과도 연결되는 통일감을 준다. 마음 에 드는 어느 자리에 앉아도 기분 좋은 자연이 눈에 들어오니, 그저 책 한 권과 함께 쉴 수 있는, 낙원 같은 공간이다.
도서관 건물 옆, 공원과 바깥의 거리를 연결하는 출입 통로도 새로 단장되었다. 가로로 놓인 기둥들이 이어지는 빈 공간에 유리로 된 천장 타일을 통해 태양광이 가득 드리우기 때문에 그 따끈함에 놀랄 수 있다. 물건이나 기타 장식이 많을 이유가 없는 이동통로지만, 벽 너머의 자연을 담는 구조 때문에 이 공간만의 특별한 온도를 입는다. 이 간결한 연결통로의 또 다른 매력은 통로 양쪽 끝에 있는 문이다. 사실 열고 닫는 문짝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출입구, 혹은 문으로 뚫려있는 구멍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 아닌 문 덕분에 펠리산느 미디어 도서관은 공원과의 연결을 넘어 펠리산느 시와도 보다 적극적으로 연결된다.
문은 공간 안팎의 가장 확실한 경계이자, 인간이 지나다니는 경로의 골자를 조성하는 주요한 요소다. 그 중요성만큼 문 디자인이 공간 전체에 주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저 통로의 처음과 마지막으로만 기능하기 위해 고안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설정된 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공간의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이미지의 문도 있다. 펠리산느 미디어도서관의 연결통로에는 두 가지 방식이 모두 활용되었다. 통로에서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보존된 포르트 코셰르 Porte cochère가 사용되었다. 포르트 코셰르는 프랑스 가옥 건축에서 마차가 출입하도록 만든, 폭이 넓고 높은 아치형 대문이다. 반면 반대편에 위치한 광장으로 나가는 출입구는 네모반듯하게 양옆으로 활짝 트여 있다. 넓은 문을 지나 오래된 안쪽 문을 통해 도서관 공원에 들어서면 마치 비밀 정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으레 잘 만들어진 것들이 그러하듯 도서관 속 많은 공간과 사물들은 충분한 의미와 재료들로 낭비 없이 잘 짜여 있다는 감상을 준다. 하지만 펠리산느 미디어 도서관이 주는 정취는 그 이상이다. 비밀 장소 같은 도서관에 들어서 책을 읽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아주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 것 같다. 아마 이 공간이 그것이 놓인 맥락과 환경까지 포괄하는 특정하고 유일한 아우라를 내뿜기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건물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확장된 정체성을 지닌 작품은 드물다. 도서관을 품고 있는 공원, 그 공원을 품고 있는 도시와 관계 맺는 이 도서관의 풍성함은 문에서부터 공간 구석구석까지 스며 있다.
May21_SpecialReport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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