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9

집에 깃든 시간과 세계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책들을 수집 중.

『최초의 집』
신지혜 지음
유어마인드

집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세계이다. 집은 삶의 모양을 만들고, 습관을 만들고, 기억을 만든다. 어떤 집에 사느냐가 한 개인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그 사람의 삶을 조금은 그려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알고 지내면서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까지 들여다볼 기회가 얼마나 자주 있을까. 어릴 때는 툭하면 친구 집에 놀러가곤 했지만, 이제는 선뜻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도, 나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도 어렵다. 신지혜 작가의 책 『최초의 집』은 그러한 집들의 세계, 한 사람에게 기억을 새긴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일했던 신지혜 작가는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열두 번째 집에서 살기까지 11채의 집 이야기를 담은 『0,0,0』과 건축물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건축의 모양들 지붕편』을 독립출판으로 펴냈던 작가다. 건축을 좋아하고 건축이 가진 사연은 더 좋아한다고 한다. 『0,0,0』을 낼 때 책 안에 ‘당신의 최초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내용의 엽서를 담았는데, 실제로 사연을 보내준 이들이 있었고 그렇게 열네 명이 지닌 최초의 집에 관한 이야기가 모여 이 책이 탄생했다.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어릴 때의 어떤 경험이 우리를 현재로 이끌었는지,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말이다.
이 책에서 최초의 집이란, 처음으로 살았던 집이 아니라 최초로 ‘집’의 기억을 주었던 의미 있는 공간을 뜻한다. 작가는 인터뷰 대상을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첫 번째 집에 대해서 듣고, 그들이 설명하고 그려준 내용을 바탕으로 도면과 스케치를 그려 곁들였다. 농촌주택, 상가주택, 연립주택, 아파트 등 집의 형태도 다양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추억도 이야기도 다양하다. 집의 형태는 어땠는지,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곳에서의 일상은 어땠는지 등 집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집의 풍경을 상상하다 보면 독자 또한 절로 저마다 ‘최초의 집’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다. 부엌만 겨우 분리된 단칸방에서 용도가 불분명한 미닫이 방이 있던 연립주택으로, 베란다가 딸린 방이 있던 작은 집으로, 앵두나무가 심어진 작은 마당이 있는 1층 주택으로, 그리고 다른 동네로 집을 옮겨 다시 그 안에서 이사를 하고 신축 빌라인 지금의 집에 이르렀다. 거쳐온 집들이 모두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떠올라 만약 내가 작가에게 엽서를 보내야 했다면 정말이지 힘든 결정의 과정이었을 것 같다. 공간은 단지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온 시간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그러한 사소해서 특수한 경험들, 집이 지닌 구체적인 지점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나간다.
태어난 집에서 계속 산다고 해서 그 집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이 달라지고, 구성원 간의 관계가 달라지고, 구성원 개인의 상태가 달라진다. 그에 따라 사용하는 공간이 달라지고 때로는 건물이 늘고 줄기도 한다. 집도 변화한다.
책에서 심현숙 씨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을 토지가 아버지 소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리고 딸이라는 이유로 빼앗긴다. 그리고 어느 날 친척 어른의 이름이 문패에 적혀 있는 것을 본 뒤로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는다. 태어나 한 번도 이사 가지 않고 첫 번째 집에서 지금껏 사는 사람도 있고, 원래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집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기도 한다. 아련한 기억의 공간이기도,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세계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계속 변하겠지만, 그 안에 깃든 기억은 늘 한결같은 풍경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