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제주의 삶

에디터 : 박중현 김지영 김선주

제주는 섬이다. 제주에는 삶이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제주를 이야기할 때 꼭 필요한 근거이자, 제주를 떠올릴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감수성이다. 과거에도 제주도는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으로 꼭 방문하던 곳이었고, 오늘날에는 저가 항공의 도움과 ‘한 달 살기’, 이주 등으로 더 친숙해졌다. 그런 제주에 대해 맛집이나 관광코스 외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제주의 삶을 과연 들여다본 적 있을까?

1—제주의 역사, 바람 잘 날 없던 섬의 강인한 생명력
제주가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도 연결된 대륙의 일부였던 구석기 시대를 제외하면, 진정한 제주‘도’로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흔히 신석기 시대에 농경 및 정착 생활이 시작된 것과 달리, 제주도에서는 여전히 채집 생활이 주를 이뤘다. 이는 제주도의 땅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화산토양이기 때문이었다. 집단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많은 유물과 함께 특히 1,700여점의 화살촉이 발견돼 한국 최고(最古) 신석기 유적지라고 불리는 제주 고산리는 제주 문명의 기원을 잘 나타낸다. 활과 화살은 구석기 시대 빙하기와 함께 매머드와 같은 동물이 사라지고 토끼나 노루 등 발 빠른 짐승들이 나타남에 따라 구비한 도구이기에, 당대 자연환경과 생활양식 모두를 짐작게 한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상고 시대 탐라국은 한반도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독립국이었다.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도 교역하고 외교를 나눴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물적·인적 토대가 약해 고대국가로 성장하진 못한다. 이에 탐라 역시 당시 약소국의 일반적인 생존방식이었던 조공외교의 길을 택한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복속을 의미하진 않았으며 탐라는 국가로서 약 1,000년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 백제, 통일신라, 초기 고려로 조공 대상을 달리하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고려 숙종 10년(1105)에 들어 탐라는 고려의 지방 행정구역 중 하나인 ‘탐라군’으로 바뀌어 한반도 역사 속으로 편입된다. 이후 고종 원년(1214)에 이름이 ‘제주군’으로 고쳐진다. 알고 보면 ‘탐라(耽羅)’와 ‘제주(濟州)’라는 말에도 이러한 의미 변화가 숨어 있다. 먼저 연암 박지원과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따르면 ‘탐라’는 소리글자로서 ‘섬나라’를 뜻하는 도국(島國)과 당시 음이 비슷했고, 이후 큰 고을을 가리키는 주(州) 앞에 ‘큰물을 건넌다’라는 뜻의 제(濟)가 붙어, ‘제주’는 한반도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행정구역임을 나타냈다.
고려에 편입된 이후 제주 도민은 끊임없이 반발하며 여러 차례 민란을 일으킨다. 이는 꼭 예전 탐라국으로서 독립과 자주를 추구했다기보다, 당시 중앙정부의 수탈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선 성격이 컸다. 몽골 침략 때 삼별초가 원나라(몽골)와 중앙정부(이미 항복한)에 대응해 반란을 일으키며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도 일부 제주 사람들은 삼별초를 도와 조정에 대항했다. 이 역시 적극적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했다기보다 지금껏 겪어온 고려 관리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는 편이다. 고려와 몽골은 모두 똑같은 외세였다. 삼별초가 진압된 뒤 수십 년간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고 곳곳에 말목장이 설치된다. 이 시기 일시적으로 ‘탐라’ ‘탐라국’이라는 호칭이 회복되나, 이는 고려로부터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원나라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후 고려에 환원되어 다시 제주로 명칭을 고치기까지 몽골의 식민 지배를 받은 세월은 약 100년이었다.
고려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던 조선시대에 들어 제주는 여느 지방 행정기구처럼 취급돼 중앙 관리인 목사가 파견되기에 이른다. 사실상 제주가 한반도의 일원으로 확실하게 편입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제주의 위상이 높아지긴커녕 고난만 더해진다. 초기에는 종속적이나마 독립국을 인정받고 이후 그나마 지방으로서 지위를 지녔던 고려시대에 반해 조선 왕조는 제주를 변방으로 취급했다. 기껏해야 ‘말의 산지’로 알려졌으며, 중앙 정치로부터 소외된 자가 귀양 가는 유배지로 인식되었다. 발령받은 목사 역시 대개 태만하여 제주 관청에는 아예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망경루(望京樓)’가 있을 정도였으니 도민들의 살림은 알만했다. 또한 육지와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조 약 500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한 유배인은 약 200명에 달한다. 위로는 광해군과 같은 왕족부터 아래로는 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지금은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는 ‘유배길’의 주인공인 추사 김정희 역시 제주도 대정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지역 포구인 모슬포는 흔히 ‘못살포’라고 불릴 정도로 바람이 드세고 척박해, 당시 그는 편지로 ‘독우(毒雨), 독열(毒熱), 독풍(毒風)이 심해 질병이 떠나지 않는다’라고 다수 호소했다고 한다. 타고난 천재이지만 스스로 고유의 일가를 이루어 추사체를 완성한 건 제주의 혹독한 환경에서 내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다.

2—제주 사람, 제주 여자
제주 경내에는 남자 무덤이 매우 드물고 마을에는 여자 많기가 남자의 세 배입니다. 부모 된 자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아이가 내게 효도를 잘할 아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라고 말합니다.
—최부, 『표해록』
돌과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려온 제주도. 돌과 바람이 많은 것은 화산섬이라는 생태적 이유지만 여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원진의 『탐라지』, 임제의 『남명소승』,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 등에서는 제주에 첩의 수가 많고, 이는 남자가 가난하거나 병이 있는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기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축첩제야 당시 시대 상황에서 굳이 제주만의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특히 차이 나는 것은 어업과 장사, 조공 등의 이유로 배의 침몰과 표류가 잦아 한 해 해난사고를 겪는 남자의 수가 1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분명 축첩제도는 봉건적 가부장 사회의 소산이지만, 제주에서의 양상은 다르다. 일단 해난사고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남편 잃은 과부와 식솔들, 특히 형제 간이나 친지 간이라면 이를 관습적으로 챙겨야 할 의무가 존재했다. 또한 사실 ‘첩’이라는 말은 제주에는 존재하지 않고 ‘큰각시’ ‘조근각시’가 있을 뿐인데, 육지와 달리 위아래를 구분하거나 하대하는 일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또한 『탐라사실』에서는 남자가 짊어지는 군정과 요역이 가혹해 아들이 태어나더라도 여자로 호적에 올려 장정을 피하고자 했던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3—제주의 자연
이러한 제주의 삶을 감싸고 있는 것은 자연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언뜻 오늘날 제주의 자연은 더없이 각광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제주의 자연이 부각되는 모습은 기괴하리만치 아쉽다. 먼저 제주 사회가 지닌 향토성에 대한 안배는 찾아볼 수 없이 관광이나 ‘한 달 살기’ 등 여행과 유희, 소비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그렇고, 제주 자연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상관없이 거대한 ‘테마파크’처럼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다시, 제주는 섬이다. 바람 많은 아름다운 화산섬이다.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태평양에 있는 제주도가 자랑하는 것은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다. 저마다의 생명체가 북서 계절풍, 그 매섭고도 혹독한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인 끝에 만들어진 것이 제주만이 지닌 독특한 식생 구조와 지역별 생태계이다. 해발고도와 지세, 화산활동 등의 영향으로 다채로운 식물을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제주만의 매력이다. 해안지대에는 아열대식물이 자라는가 하면 산 위로는 고산식물이 고개를 내민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용솟음치며 부드러운 능선으로 자라난 360여개의 오름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제각각 제주만의 오름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편평한 화산암반지대인 ‘빌레’와 곶자왈을 내어 각기 독특한 생태계를 뽐낸다. 특히 곶자왈은 동식물, 목재, 생활 도구 및 재료, 연료목 등을 공급해 제주 사람들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숲이었으며 남·북방계 양치식물이 공존해 생물 다양성이 높은 원시림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간섭을 받아 벌채되었고, 현재 원시림이 없어진 후 이차적 조성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더군다나 숲을 파헤쳐 대형 미술관을 만들고 신화 박물관과 영어 마을에 자리를 내주었다. 비자림을 비롯해 제주의 숲은 지금도 편의와 관광을 위해 계속해서 베어지고 있다.
큰 바람은 막지만 작은 바람은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며 생태계의 원천인 이끼까지 자생하는 제주의 자랑 돌담도 사라지는 중이다. 올레길의 유행으로 제주 바닷가 집값은 치솟았으며, 수많은 ‘올레꾼’들로 인해 사생활을 보호하고자 담은 높아졌고 돌담에는 시멘트가 발라졌다. 제주도의 자연은 공원으로 전락하고 있고, 제주도의 문화는 고유성을 상실한 채 도시화되고 있다. 제주 시내에는 입시학원과 신흥 교육 지구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제주도의 많은 땅이 중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에 잠식되고 있다. 파괴와 도시화는 물론 아예 다른 땅이 되어가고 있다.

4—살아 숨 쉬는 신화의 섬
신화를 알면 제주가 보인다
예로부터 절해고도의 섬이라 불리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품고 살아온 제주도.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문명의 유입이 늦은 만큼 무속신앙과 같은 전통과 문화는 그 원형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제주도에는 1만 8,000명의 신이 산다고 하여 ‘신들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제주에서는 신화를 두고 신의 근본을 푼다고 하여 ‘본풀이’라 하는데, 신의 출생부터 내력을 해설하는 서사무가다. 때문에 인물 설화가 매우 많으며 대부분 무속신앙의 갈래로서 노래의 형태, 즉 구비전승의 형태로 전해졌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조금씩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변형되어 같은 이야기라도 세부내용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풍습, 문화, 신념이 보다 밀접하게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은 같다.
신화의 발생과 전승 과정은 그것이 생겨난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특히 제주도 신화는 바다에 둘러싸인 생활방식과 지형적 특성에서 기원한 삶과 문화가 더욱 잘 드러난다. 또한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찍이 바닷길을 통해 다른 지역과 관계를 맺어온 덕분에 육지 신화와 해양 신화의 모티프를 모두 지니고 있어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었다. 신화는 단지 신화적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아낸다. 신화 속 인물들의 삶은 곧 제주 사람들의 삶이다. 결국 제주의 신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주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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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크뤼천 Photo © Folke Olesen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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