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16

정의라는 이름의 불의, 현재를 예언했던 과거의 책

Editor. 지은경

충동 구매와 잦은 폭식으로 위장 상태가 불량한 채식주의자.
키우는 삽살개의 촉촉하고 까만 코를 만지면 행복해진다.
동물학대를 응징하는 자경단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안 나타나면 자신이 될 기세)

『멋진 신세계』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소담출판사

1932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출간되었을 때 소설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분위기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정기간행물 『뉴스테이츠맨』은 미래를 얄팍하고도 하찮은 말장난으로 풍자했으며, 작품의 빈약함을 반복을 통해 보완하려고 했다고 평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파시즘 성향이 열을 올리기 시작한 무렵이었기에 사람들은 소설의 파시즘적 이야기에 반발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결국 소설은 파시즘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흔들리는 사회의 장면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정해진 대로 태어나고 그것에 맞게 행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생명과 창의력, 두뇌를 가진 인간은 자신 안에 무언가 들어 있다는 기분, 이미 훌륭하지만 훨씬 강력하고 훨씬 격렬한 무엇, 표현해야 할 더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는 생각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완벽하게 인간의 사회를 통제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또는 1930년대 사람들은 소설이 그리는 신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상력이 충분히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우리도 앞으로 80년 정도 흐른 사회의 모습을 금방 상상할 수 있겠는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문제들과 부패, 부조리가 섞인 사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가끔 “싹 다…”, “모조리 없어졌으면…” 등의 극단주의적 상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테러주의자들을 바라보며 “모두 티벳에 보내서 정신수양을 시켜야 해.” 혹은 “동물학대자들이 자신들이 학대한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껴봐야 해.”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인간들은 과학교육을 다시 받아야 해.” 등과 같이 말이다. 그러한 상상들만으로도 무거운 마음은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인지는 확실히 장담하기 어렵다. 자유의지라는 것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불합리와 부조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또 한 가지, 과연 부조리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은 어느 누가 감히 결정하고 조종할 것인가? 책이 서술하는 이상향의 사회에서 아기들은 유리병 안에 보관되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교육을 받는다.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은 애초에 배제하며 시민들은 알파와 베타, 감마, 엡실론 등의 계급으로 나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들의 계급에 불만을 느끼는 이는 없다. 인간은 각 계층에 알맞은 체격과 지능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세계를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사회의 안정과 물질적 풍요다. 이는 지금의 우리 세대가, 그리고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줄기차게 외치는 가장 중요한 두 단어이기도 하다. 또 매체를 통해 빅데이터를 통해 모든 정보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통제하려 드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다수의 사람과 이에 반기를 드는 외로운 소수. 그야말로 완벽한 현재의 사회상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어쩌면 2000년대의 사회를 오래전에 예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똬리를 튼다. 작가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멋진 신세계』를 펴낸 뒤 27년이 지난 1958년에 출간된 책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는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하는 사회의 세세한 부분을 분석하여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이다. 1930년대 헉슬리는 당시 그가 그리던 미래의 사회가 점점 현실이 될 것에 확신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현실이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7년이 지나고 그동안 변화된 사회의 자취를 살펴보니 자신이 예언했던 풍경과 점점 닮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조금은 더 강하게 들었던 것일까?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는 사회의 문제들을 하나씩 자세하게 제시한다. 그렇게 진화되는 사회의 큰 그림을 그린 그는 뒤이어 해결방안까지 제시하려 든다.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이 아닌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유도하고자 한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지극히 미개하기도 하고 또 지극히 발전적이기도 하다. 강하면서도 나약하다.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는 교활한 소수의 지도 계층들,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게 하고 무언가에 홀리게 하는 행위들은 오늘날의 광고 전략과 종교 활동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미개한 대중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고 양심의 기능이 작동조차 되지 않는 소수의 강자들. 그들을 향해 하염없이 따라가는 대중은 어두운 밤 밝은 빛 주변으로 모이는 모기떼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책을 든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상상하던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왜곡 없이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두 권의 책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경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진실을 알기 전에 선택할 수 있었던 빨간색과 파란색 알약처럼 말이다. 인간과 인간사회의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순환을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책을 집어 들고, 진실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하루하루 편안하게만 살고 싶다면 이 책은 열어보지 않길 충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