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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0

인생이라는 곰탕

Editor.허재인

『곰탕』
김영탁 지음
아르테(arte)

한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이우환. 한 곰탕 집의 말년 보조 주방장인 그가 옛날 참 곰탕의 비결을 알고 싶어 목숨을 걸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바로 소설 『곰탕』의 내용이다. 왜 하필 곰탕일까? 왜 많고 많은 음식 중에 곰탕을 가지고 왔을까? 작가가 만들어낸 미래 사회에는 모든 가축이 바이러스로 인해 멸종되었다. 과거의 소 맛을 끄집어내 만든 가축 쥐 고기 맛에 대한 설명은 누린내 말곤 없었다. 곰탕이 아닌 스테이크의 육즙과 풍미를 그리워할 법도 하다. 아니면 시원하게 얼려 놓은 신선한 육회의 쫀득함을. 하지만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곰탕을 고집한다. 미래에 우리가 가장 그리워할 맛, 가장 구현하기 어려울 거라는 맛, 그것은 정말 곰탕일까?
곰탕은 우선 집마다 고유의 레시피가 있다. 대파 뿌리와 통후추를 넣는 집이 있는 반면, 늘보리를 넣어 잡맛을 제거하는 집이 있다. 국물을 우려내는 시간도 제각기, 핏물을 빼는 시간도 제 각각이다. 특히 끓이는 시간은 집마다 천차만별인데, 어느 정도 통용된 사실은 오래 끓일수록 그 맛이 진해지고, 귀해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간이 많이 들어갈수록, 먹는 사람은 단숨에 먹을수 있다. 끈적한 기름이 둥둥 떠 있지 않을 수록, 입안에 거슬리는 불필요한 건더기가이 사이에 끼어 국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곰탕을 참 맛있게 먹었다 한다. 중간중간 곱게 썬 양지머리와 아롱사태 한두 점과 깍두기 한 알을 숟가락에 올려 한입에 넣고 자근자근 씹어본다.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는 양지머리, 씹을수록 재미지는 아롱사태의 쫀득한 식감, 그리고 적절한 산미로 밸런스를 맞춰주는 깍두기의 화려한 서포트까지. 거기에 송송 썰어 들어간 대파가 운 좋게 한 숟갈에 포함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하고 완벽한 한 입이 어디 있을까. 변치않은 참 진리는 바로 부모님이 직접 곤 곰탕이 최고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버지 종인이 아들 순희에게 한 그릇 떠주는 곰탕은 기다림을 상징한다. 곰탕은 애초부터 기다림의 미학이다. 게다가 소설에서 아버지 종인은 곰탕을 만드는 것에도 끝없는 인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반항하는 아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그가 알아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린다.
“종인은 물을 끓이고 뼈를 넣고, 살을 집어 넣고 국을 내고 살을 삶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많은 주방장들은 물을 올려놓고 국을 끓이는 동안 뭔가를 부지런히 했다. 하지만 종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불 앞에 앉아 있었다.”
기다림과 나이 듦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곰탕 한 그릇을 먹은 뒤의 여운처럼 머무른다. 나이가 들면서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30대 초반까지는 출발대의 총성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아왔다. 뭐든지 시작을 좋아했고, 기다림은 지겹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겼다. 열정과 젊음이 전부였던 때다. 총성이 들릴 때마다 나는 좌우 볼 틈 없이 허겁지겁 앞을 향해 달렸고, 간혹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 때문에 뛰다가 떨어트린 마음의 불순물을 볼 틈이 없었다.
요새는 번아웃을 느낀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불순물을 만들고, 주변을 살피지 않은 채 몰입하다 보니 단편적인 성취는 있었지만, 내면에 뽀얀 진국은 없었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엔진이 고장 나고, 어쩔 수 없이 다음 번 총성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찰나, 우연히 기다림을 경험해보며 지나온 자리의 불순물을 보게 되었다. 한 템포 쉬면서, 호흡을 강불에서 약불로 줄여보았다. 잔잔한 거품들 사이로 뽀얀 모습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 듦이란,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지만, 수백 번의 총성과 달리기, 그리고 번아웃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부모란 자식보다 ‘나이 든’ 자다. 그들에게도 자식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예전 모습처럼 불순물을 들고 따라오는 자식을 바라볼 때 자신의 닳고 닳은 뼈라도 내어주고 싶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불순물을 대신 치워주고자 자식 앞에 다가서면, 자식은 앞을 가린다고 짜증을 낸다. 결국 부모는 기다리는 방식을 선택한다. 부모의 뼈 국물에는 불순물이 없다. 이미 우려낸 시간이 두 배나 길다. 자식은 부모의 뼈 국물을 따라, 자기만의 곰탕을 우린다. 그렇게 부모도, 자식도 나이가 들어간다. 기름과 불순물하나 없는 사랑과 함께.

곰탕 레시피
재료
사골, 등뼈, 아롱사태, 늘보리 1컵, 대파(수염 포함), 통후추 30알
1. 사골과 등뼈 3kg(생략 가능), 양지, 2시간 가량 핏물 뺀 아롱사태를 준비한다.
2. 찬물에 사골, 등뼈를 넣고 끓인다. (찬물에 넣고 끓이기 시작해야 뼈에 붙은 이물질이 빠진다.)
3. 물이 끓으면 불을 끄고 찬물에 세척하고 첫 물은 버린다.
4. 다시 뼈를 넣고, 물을 넣고, 늘보리, 대파, 통후추를 넣고 푹 우리면서 계속 불순물을 제거한다. 시간은 길수록, 정성을 다할수록 좋다. (아롱사태와 양지는 따로 삶고, 기름이 올라오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