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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0

인생의 오후, PLAY IT AGAIN

글. 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앨런 러스브리저 지음
이석호 옮김
포노

마흔, 평균 수명 100세 시대인 요즘에는 인생의 전반기에 속할 정도의 나이다. 인생 전반을 생각했을 때 앞으로의 시간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직 마음만은 청춘’에 기대어 마음대로 무언가에 도전을 하거나 즐길 수도 없고 ‘나잇값’의 행동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청춘’이 고작해야 10년 남짓뿐인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속절없이 든다. 그때마다 한번씩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 떠올리는 두 분이 있다. 나이 마흔에 소설가가 되신 박완서 선생님과 나이 마흔에 ‘핑크빗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화가 윤석남 선생님. 어쩌면 나도?! 하는 희망을 품게 되는 이름들이다.
『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의 저자 앨런 러스브리저Alan Rusbridger는 더 큰 희망의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무려 쉰일곱에 난곡으로 손꼽히는 쇼팽 발라드 1번을 공개석상에서 연주하기로 마음먹고 치열한 연습에 돌입한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심리학자 융의 말을 빌려, 그 결심의 계기를 밝힌다.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며, 자식을 생산하고 돌보면서 우리는 인생의 오전을 보낸다. 이것이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삶의 오후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오전을 지배했던 자연의 법칙이 각자의 영혼에 일정 정도 피해를 입혔음을 깨닫는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벌고 가족을 꾸려 자녀를 기르는 일은 오직 자연 법칙에 따른 일이며, 그것 자체를 문화라고 부를 순 없다. 문화는 자연의 섭리를 넘어 존재한다. 어쩌면 문화는 인생의 하반기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앨런이 느꼈을 법한 울림이 마음을 치고 퍼져 나간다. 감히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묵직한 공감은 나만의 것이 아닐 테다.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중에 최고 경지인 ‘자아실현의 욕구’에 해당한다. 자기 인생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초 단계를 지나, 결혼과 육아에 돌입하면 삶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나의 인생에 내가 직접 움직이는데 정작 나는 빠진 것 같은 아이러니한 외로움에 아연해지는 순간, 비로소 ‘나’를 찾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인다. 그 욕망을 적극적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테지만, 앨런은 그 과정을 해낸다. ‘인생은 육십부터’인 것처럼.
이 책은 앨런이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로서 쇼팽 발라드 1번 마스터를 위해 장장 일 년 반 동안 고군분투하는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기록이다. 또한 이 책은 영국 언론 잡지 『가디언』의 편집국장이기도 한 앨런이 전하는 세계적 스캔들에 대한 긴박한 보고이기도 하다. 특히 리비아에 피랍된 기자를 구출하러간 상황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였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앨런은 호텔 로비에 놓인 낡은 피아노로 하루 일과 시작 전 20분씩 연습 루틴을 유지한다. 감당하기 힘든 일과 속에서 틈틈이 피아노에 한눈을 파는 일은 앨런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삶의 동력을 만들어주는 숨구멍이었을 것이다. 쇼팽 발라드 1번 연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가 개인적, 공식적으로 만난 여러 피아니스트(그중엔 무려 베토벤 계보의 리스트의 제자에게 사사한 로젠도 있다)와의 대화, 좀처럼 악보를 외우지 못하는 난관을 딛기 위한 신경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스타인웨이 피아노 구매 과정에서의 고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마침내 연주회 당일에 대한 회고 부분은 그날의 긴장된 감정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섬세한 비유가 총망라된 여느 문학 작품을 방불케 했다.
쇼팽 발라드 1번 연주에 이르기 위한 앨런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책에서 언급된 피아니스트들의 서로 다른 연주 버전을 들으며 쇼팽에 흠뻑 빠져 보고 싶어졌다. 지금은 중단한, 지난날 내가 피아노를 통해 얻은 위로의 시간들도 떠오른다. 어렸을 적 피아노를 배워봤던 사람이라면 앨런이 한 말을 똑같이 마음속에서 외치게 될지 모른다. Play i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