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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0

인생의 선율, 리듬, 그리고 화성

글. 김지훈

책방마니아. 독립출판 컬렉션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소개한다.

『망나니의 난』
김유체 지음
독립출판

예술 형식에는 나름대로의 구성 원리가 있다. 문학에서는 단어, 문법, 서사가 필요하다면, 음악에도 선율, 리듬, 화성 이렇게 3개의 기본 요소가 필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음악과 직접 관련 있는 독립출판물을 소개하기보다는, 한 개인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 공무원을 3번이나 합격하는 과정을 서술한 독립출판물을 읽은 소감을 음악의 3가지 요소에 빗대어 써보고자 한다.
선율(Melody)
선율은 고른 음이 여러 가지 높이와 리듬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전형적으로 하나의 선율은 몇 개의 선율진행들로 만들어지는데, 걷고 도약하고 반복하는 음들의 조합이 그 선율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결정한다. 김유체는 고등학교 시절 유명한 말썽꾸러기였으며, 전교 꼴찌로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다(걸음). 재수 끝에 지방대 공대에 추가 합격으로 입학한 뒤 피나는 노력을 통해 단과대 수석으로 졸업하는 쾌거를 이뤄낸다(도약). 공기업, 시행사 등의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퇴직을 하고 대학원 준비를 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고 가해자로 몰려 4년 정도의 소송을 거치고 5년가량의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았다(걸음). 30대 여성으로서 지속적으로 일을 하며 경력을 이어가는 방법을 찾던 중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기로 했고(반복), 3년간의 혹독한 수험 생활을 통해 3군데 공무원에 합격했으며(도약), 공무원 생활을 하는 와중에 이 책을 2019년 여름에 발행하였다(반복). 이 책을 통해 드러난 김유체의 삶에서 대학 합격과 수석 졸업, 공무원의 합격 정도를 ‘도약’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 자체가 극적이지는 않다. 평범한 한 인간의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그리고 계속된 도전 과정은 단조로운 선율 진행으로 보는 편이 맞겠다.
리듬(Rhythm)
리듬은 음(표)과 쉼(표)이 길이를 달리하며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음표의 장단, 악센트, 음의 셈여림, 빠르기 등에 따라 되풀이되는 흐름이 곧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등록금은커녕 급식비조차 못 내는 어려운 형편에 말썽 피우고 공부도 최하위권이었다는 사실은 고1 담임 선생님의 ‘꼴통’이라는 표현 하나로 함축된다. 고2 초반,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김유체는 충분한 성적 향상을 보이며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그림까지 그려볼 수 있게 된다. 결국은 재수 끝에 추가 합격으로 대학에 간신히 들어간다. 학과 수석으로 대학 생활을 했다고 하면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을 거라 예상되는데, 실제로는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오해받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책에 나온 김유체의 삶을 보면 일정한 흐름으로 형성되는 박자가 보이지도 않고, 박자로 이루어진 리듬도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화성(Harmony)
화성은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릴 때 생기는 음악 현상이다. 몇 개의 화음이 연결되어 독자적인 모양을 갖춘 형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풍부한 울림이 느껴지고 독자적인 이야기가 형성된다. 이 책에는 공무원 합격수기가 나와 있지만 그건 별책부록에 가깝고, 오히려 김유체라는 한 인간의 고군분투기에 더 가깝다. 김유체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직장 생활이나 인간관계, 사회 부조리에 대한 환멸과 실망감도 많이 느꼈을 테다. 우여곡절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 자체로 엄청난 성공이 눈앞에 펼쳐지지는 않았다. 공무원 이기에 겪어야 하는 사회적 기대와 책임감 그리고 모욕감도 이겨내야 했다. 하고 싶은 말도 예전처럼 거침없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한 인간이 겪었던 작은 경험과 인생은 김유체라는 필명을 달고 작은 책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뭇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고 있다. 내가 음악의 3가지 요소인 선율, 리듬, 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온 김유체의 삶 또한 단편적으로만 알지,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잔잔한 울림이 카페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이름 모를 음악이 주는 예기치 않은 감동과도 비견될 수 있다는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