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Report

이탈리아 로마, 『코린나』순수한 기쁨, 달콤한 휴식

에디터. 김수미 / 그림. 마일즈 하이만 / 자료제공. 루이 비통 © Louis Vuitton

뙤약볕은 뜨겁고, 몸은 무겁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고루했다. 대학생 시절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의 종착지,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이었다. 3주 동안 6개국 11개 도시를 탐방하겠다던 무리한 욕심 때문에 체력이 바닥난 탓이었을까, 여행자로서의 시간, 체력, 배경지식 모두 빠듯했던 탓일까. 기대보다 다소 미지근하게 마무리되었던 그 여행이 종종 아쉬움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때의 나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로마에 입성한 또 한 명의 인물을 소설 속에서 만났다.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el의『코린나』에 등장하는 청년, 넬빌 오스왈드다.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 명문가의 자제로 아버지를 여읜 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남쪽으로 가서 요양하라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이탈리아로 향하지만, 본디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천성을 슬픔이 자꾸만 짓누른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행운이 따른 모양이다. 코린나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경사로운 일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와 군중들의 열띤 수군거림이 온 로마를 가득 채운 어느 날 아침, 코린나가 시인으로서 관을 수여받는 예식이 열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친다. 이때부터 넬빌의 따분하던 여행은 순식간에 생기를 띠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는 ‘현대 로마의 거의 전부가 고대 로마의 잔해로 세워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로마의 어디라도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언제부터 멈춘 것인지 쉽게 짐작조차 가지 않는 풍경이 대도시의 실용적인 즐거움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는 적잖이 지루함을 안기기도 한다. 『코린나』 속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인물들이 로마를 ‘방치된 도시’ ‘무덤의 조국’이라는 식으로 일컬으며 낮잡아 보듯이 말이다. 이에 ‘무조건적으로’ 이 도시를 사랑한다고 밝히는 코린나는 넬빌을 위해 로마 안내를 자처한다. 이들은 판테온을 필두로 성 베드로 대성당, 카피톨리노 언덕,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보르게제 별장 등 로마의 주요 명소들을 함께 누빈다. 로마에 대한 지극한 애정은 물론 높은 수준의 역사·문화·예술사적 지식까지 겸비한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시공간을 거슬러 1800년대 초, 로마의 어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지식에만 기대어 로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코린나는 축제 같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와 달빛 아래의 콜로세움이 어떻게 다른지, 그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감응하는지, 그때 어떤 상념이 떠오르는지 등을 매 순간 느끼고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인물이다.
『코린나』를 쓴 마담 드 스탈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성장에 기여해 프랑스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이탈리아 여행과 실존했던 주변 인물들, 그리고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속 남녀 주인공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대립 구도에 놓여있기도 하다. 넬빌로 상징되는 당시의 영국은 정치적 선진국이며, 사회 제도부터 가정의 규율까지 정해진 규약을 엄격히 따르는 사회다. 반면 코린나로 대표되는 이탈리아는 여권(女權)을 존중하며 다양성과 자율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나라로 그려진다. 자유분방한 이탈리아인에 대해 내심 편견을 가진 넬빌은, 사랑을 숨기지 않고 감정 표현에 능한 코린나에게 깊이 매료되었으면서도 ‘영국인 아가씨다운 순진함’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미래를 불안해하여 코린나를 비롯한 뭇 독자들의 애를 태운다. 그는 때로 로마의 유산 앞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기준만을 앞세우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국으로 대변되는 ‘힘’과‘관습’의 세계에 반격하는 메시지를 견인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여성주의 소설로도 읽힌다. 19세기 소설에서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주인공과 대조적으로 의연하고 지적이며, 상대의 성장을 기다릴 줄 알고, 사랑에 능동적이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버리지는 않는 여주인공의 발견은 어쩐지 통쾌한 뜻밖의 재미를 안겨준다.
『루이 비통 트래블 북』 〈로마〉를 작업한 마일즈 하이만Miles Hyman의 그림은 소설 속 로마 여행을 더욱 실감 나게 한다. 그가 길어 올린 로마 특유의 풍부한 붉은색, 황금색, 황토색, 은은한 청록색 등을 통해 코린나가 소개했던 로마의 오래된 장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이만이 로마에서 영감을 얻는 방식은 코린나가 로마를 대하는 방식과 일면 닮은 구석이 있다. 작업을 위해 로마 곳곳을 누빈 그는 종종 무언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때가 많았다. 로마에 가면 누구나 으레 어떤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파악하려 급급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 장소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느끼기를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포착한 로마만의 매력이란, 영원함을 상기시키는 불멸의 걸작품들과 그 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내는 대조적 풍경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상징물들과, 그 앞에서 시시각각 그려지는 다채로운 일상은 마치 한 구절의 시처럼 덧없는 아름다움과 유쾌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사라질 것 같은 그 찰나의 풍경, 순간적인 빛과 그림자의 결합을 하이만은 담백한 선과 깊이감 있는 색으로 담아냈다.
로마를 여행하는 법에 있어서 만큼은 두 작품 사이의 200년 남짓한 시간적 간극이 무색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에 지극히 길들여진 우리는, 자칫 이를 오해해서 알지 못하면 전혀 즐길 수 없다거나, 무언가를 즐기는 하나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코린나는 로마에 몇 세대를 초월하는 예술적 유산들이 가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애써 비판하려 들기보다 순수하게 즐길 줄 알고, 그것에서 발견되는 재능에 아낌없이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옳고 그름,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비판할 줄 아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거나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놓치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짧음이 그 어느곳에서보다 선명하고, 우리 인간이 아름다움과 훌륭함 앞에 경탄하는 창조물임을 일깨우는 로마에서라면 더더욱.
July22_Rome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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