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15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위하여

Editor. 박소정

밤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별들을 보면 약간의 밝기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똑같아보인다. 하지만 작은 망원경으로만 보아도 크기와 모양이 엄청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취향을 보이며 대중이라는 틀로 손쉽게 묶인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과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각 개인은 하나의 틀로 묶일 수 없이 너무나 다른 존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다름’을 부딪치며 깨우쳐가는 와중에 우리는 가끔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고독함을 느낀다. 모두가 갑자기 하나로 똘똘 뭉쳐 ‘먹방’에 열광할 때, 알 수 없는 ‘썸’ 같은 신조어를 남발할 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약속에 늦는 것을 당연히 여길 때 등 스스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 여긴 또 어딘가’라며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얘기하고는 있지만 나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이런 낯선 상황을 선물로 안겨주고 있을지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 앨리스가 고양이에게 말한다. “저는 미친 사람들 속에 가고 싶지 않아요.” 고양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답변하며 덧붙인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미쳤는걸.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올 수 없어.”

『이방인』 알베르 카뮈
더클래식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알베르 카뮈에게 최연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카뮈는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인 아버지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빈곤과 병고를 빈번하게 겪으며 삶과 죽음,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작품 집필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실존주의와는 다른 부조리와 반항을 표하며 사르트르와 노선을 달리하기도 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파격적인 문장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눈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동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 날 바로 여자친구와 코미디 영화를 즐기고 사랑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한낮에 우발적으로 아랍인을 권총으로 살해하게 된다. 법정에서 그는 범행 동기를 “태양 때문에 눈이 부셔서”라고 답하며 반감을 사게 된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과 그 이후의 행동에서 보였던 무심한 태도까지 더해지며 그는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히며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소설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삶에 여유가 없을수록 이런 철학적 문제들은 낯설고 어렵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작품이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계획을 짜는 사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가치를 위해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 등 부조리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자, 모두가 이 시대의 이방인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언젠가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존재 증명’의 명제는 우리들의 이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밀려 쫓겨나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는 셈이다. —본문 중 편지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외롭다’는 말을 잘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 소모를 막을 수 있도록 인류가 진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단순히 우리가 그런 감정을 좀 덜어낼 수 있도록 기술이 발전한 것이다. SNS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외면하고 싶은 감정들을 손가락을 움직이는 한 쉽게 외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그 길 위에서 고독할 기회를 놓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불어 그는 이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숭고한 시간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를 결코 나누어 질 수 없는 주권이자 지켜야 할 성처럼 보고 있는데, 현대인들이 이를 방어하기보다 무심코 익명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퍼다 나르고 있다며 심각성을 제기한다.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구조, 제도, 도덕 등 견고한 모든 것이 액체처럼 녹아버리는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정리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불안한 근대의 삶을 철학적으로 관찰하고 진단하여 총 44개의 편지라는 형식으로 이 책에서 전달하고 있다. 가상적인 관계들이 현실적인 관계를 능가하고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시간이 흘러도 견고함을 자랑할 지혜를 전달해줄 것이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낯선 외국에서 가게 점원이 “What?” 하고 큰 소리로 되묻거나 자동차 공장에서 떠듬떠듬 증상을 설명할 때를 떠올려보자. 단순히 외국어로 잘 말할 수 없어 슬프다기보다는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하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요즘 말로 ‘아이고 의미 없다’의 상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로써 책의 제목은 한결 쉽게 이해된다.
하루키가 1990년대 초 미국에서 3년여간 체류하며 느낀 미국 문화와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된 자신과 일본의 문화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한 에세이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강의를 하며 미국 대학 사회의 엘리트들과 지내게 되었다. 지방지보다는 『뉴욕타임스』를 버드와이저보다는 기네스를 마시며 오페라를 들어야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음에 당황스러움을 느끼지만 한편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도 느낀다. 일본에서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철에 따라 변하며 신경증적으로 그 유행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오페라냐, 지금은 가부키지’라는 식이다. 작가는 이를 모두가 밭 하나를 모두 태운 뒤에 다음 밭으로 옮겨가는 ‘문화적 화전 농업’이라 따끔히 꼬집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도 확신이 잘 서지 않을 만큼확신의 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다. 불안의 시장을 파고들어 확신에 찬 어조로 ‘하라, 마라’를 외치는 어느 작가에게 우리는 매료될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작가는 수줍은 듯 솔직하게 자신이 겪었던 어느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만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루키의 이야기가 자신이 좋아했던 것에 대해 솔직해지는 기회를 갖게 할 수도,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매사에 진지해져 버린 자신에게 ‘쿨함’을 던져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