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6

유희일까 퇴행일까

Editor. 유대란

몸에 나쁘고 후회가 예정된 일들에 투신한다.
소독차를 보면 쫓아가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위스키에 나물 안주를 먹을 때 행복하다.

『비밀기지 만들기』
오가타 다카히로(일본기지학회) 지음
프로파간다

일본에 ‘기지학회’라는 게 있다. 비밀기지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목적인 단체란다. 여기서 펴낸 『비밀기지 만들기』는 비밀기지의 종류와 비밀기지를 구축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기지가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그 기지는 아니다. 최첨단 탐사 장비가 쓰이고, 군사 실험이 극비에 거행되는 그런 기지가 아니라 널빤지로 지은 집, 방파제 틈새 같은 곳을 ‘기지’ 삼아 놀던 유년의 공간들이다. 건축가이자 ‘기지학회’의 수장 오가타 다카히로는 1998년부터 이런 비밀기지들을 연구해서 누군가 실제로 만들었던 기지를 선정하고 분류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 귀여운 책은 그런 시도들을 그림과 함께 보여준다.
대부분 자기만의 비밀기지를 만들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산 손잡이 부분을 서로 걸어서 집을 만들고, 옥상 빨랫줄에 걸린 이불 사이에 들어가서 인디언 놀이를 했다. 친구들과 다락, 광, 옷장 같은 데 들어가서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그 안에선 딱히 하는 게 없어도 신이 났다. 그런 데서 잠들었다가 부모님이 실종 신고를 한 적도 있고, 안에서 문이 안 열려 혼쭐도 났는데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그곳을 ‘아지트’라 불렀다. 우리는 ‘비밀단원’ 들이었다. 물론 비밀이랄 건 딱히 없었다. ‘비밀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비밀이었다. 우리는 단순히 비밀의 속성을 좋아했던 것 같다.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어떤 은밀함, 뭔가에 공모한다는 짜릿함 같은 것이 개구쟁이들을 꾀었다.
‘아지트’는 위험한 곳일 때도 있었다. 공사장의 토관, 대형 배수구 같은 곳에 기어들어 갔던 걸 떠올리면 아찔하다. 어느 날은 가보면 우리의 아지트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려서 새로운 곳을 물색해야 했다. 그러면 우리는 나라를 잃은 군인처럼 비통해하며 동네를 떠돌아다니다가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고 만화책, 과자 따위를 숨겼다. 비밀기지가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어른에게 들켜서 철거당하는 경우였다. 그러니까 비밀기지는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온갖 위험과 매력이 도사린 곳이었다. 비밀의 속성을 배우고, 위험과 지혜를 경험하는. 어설프기는 했어도 그건 독립의 예행연습이자 자발적 유희의 시초였다.
“비밀기지 만들기란 크고 작은 위험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비밀기지 만들기 체험을 통해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소중한 것을 배웠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어른이 된 지금도 비밀을 좋아한다. 나는 도시 곳곳에 비밀기지를 설정해놓았다. 예컨대, 좋은 밥집이나 술집을 발견하면 잘 공유하지 않는다. 고이 꿍쳐두었다가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만 방출하거나,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세 번째 만남 즈음에 데리고 간다. 그리고 입구 문턱에서 한 번, 나올 때 한 번 더 다짐을 받는다. “쉿, 소문내지 마세요.” 좋아하는 점포도 그렇고, 좋아하는 장소도 그렇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찾는 공간이 있다. 번화가 속 대형 건물에 둘러싸인 넓은 주차장인데 아스팔트 바닥에 주차선이 그어져 있는, 서울 시내 어디에서든 볼 법한 평범한 곳이다. 폐쇄적으로 운영해서인지, 그저 운 좋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인적이나 차량이 드물어서 우리는 눈 내리는 밤이 되면 들고양이처럼 잠입해서 시간을 보낸다. ‘꺄아!’ 거리며 훼손되지 않은 눈을 마음껏 밟고 뛰논다. 우리는 이곳의 좌표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이곳을 ‘비밀의 장소’라고 부른다.
우리의 회합은 이름도 그렇고 장소성, 시간성도 꽤 낭만적이다. 그런데 시인하건대 퇴행적이기도 하다. 비밀을 만들고 싶은 마음, 공간을 독점적으로 누리고 싶은 배타적인 욕구는 유아적이다.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이 태도는 뚜렷한 목적과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또는 상정할 수 없는) 이들의 느슨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아마 숱한 컬러링북, 필사책이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뭐가 됐든 도시 속 나만 아는 틈새 몇 개 찾아보는 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걷는 익숙한 거리를, 평범한 산책로를 훨씬 흥미롭게 해줄 것임에 틀림없다. 퇴행일까, 유희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