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19

윗사람이 보면 좋을 책

Editor. 이희조

개미와 베짱이 중에 저는 아직 개미가 더 쉬워 보입니다만.

『훈의 시대』
김민섭 지음, 와이즈베리

회사를 고를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직무 적합성이나 업무 환경, 연봉 등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진 않아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다. 경영 철학이나 회사의 설립 정신이다. 혹시 새로 회사에 들어간 첫날, 사무실 한쪽에 이런 사훈이 붙어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한다,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일찍 출근한다(…)” (실제로 책 속에서 작가가 보고 놀랐다는 사훈이다.) 회사 홈페이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런 사훈을 가진 회사였다니, 지금이라도 당장 입사를 무를까 심각하게 고민할 법하다. 혹은 이런 개그를 시전하는 곳이라면 조금 나을까? “죽을 만큼 일해도 안 죽는다” “河己失音 官頭登可(하기실음 관두등가, 물 흐르듯 아무 소리 없이 열심히 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동료가 사장님께서 어느 날 너무 멋진 사훈이 생각났다며 액자로 걸어두었다고 멋쩍은 듯 사정을 설명해준다. 물론 취향 저격이라면 할 말 없지만, 크게 웃기지도 않고(사장님 빼고) 의미를 헤아려봐도 퍽 유쾌하지 않은 그런 사훈들을 입사 후 뒤늦게 발견하는 경우는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메시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훈의 시대』 저자는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훈(訓)’을 통해 그 메시지 안에 새겨진 시대의 욕망을 들춰본다. 집에서 정하는 가훈도 있지만,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야말로 훈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된다. 교문 앞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교훈에, (요즘은 많이 없어졌다는) 매주 월요일 조회 시간 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과 교가 제창 순서 등 학교는 지식 전달을 넘어 여러 ‘훈’을 제시하는 현대판 서당이다. 막상 돌이켜보면 우리 학교 교가가 어땠는지, 교훈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길게는 6년, 짧게는 3년 동안 우리를 둘러싸던 교훈들은 분명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기껏해야 ‘성실’ ‘정직’ ‘예절’과 같은 좋은 말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고와 남고의 교훈을 분석해보니 여고에는 ‘순결’ ‘정숙’ ‘예절’ ‘배려’ ‘사랑’ 등의 단어가, 남고에는 ‘단결’ ‘용기’ ‘개척’ ‘책임’ ‘명예’ ‘열정’ 등의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했으며, 한 여고의 경우 교가 후렴구에서 “아, 여자다워라”라는 가사가 반복되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도 그런 가르침은 계속 이어진다. 입사하기 위해 회사의 비전과 슬로건을 열심히 외우고, 지원 동기에 그 가치들에 내가 얼마나 부합한 존재인지 적은 뒤 입사 후 까맣게 잊어버리기는 게 정상이지만, 언어화된 사훈의 존재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정당화되는 근거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고객이 왕이다’라는 사훈은 회사에서 고객을 왕처럼 받들지 못한 직원을 질책할 근거가 된다. ‘죽을 만큼 일해도 안 죽는다’는 사훈은 죽을 만큼 부려먹겠다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눈치 안 보고 정시에 퇴근할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곧 그런 사훈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답은 사원이 바뀌든가, 훈이 바뀌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훈들이 남아 이 시대와 여전히 동시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야만의 언어들이,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언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은 몹시 모욕적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이제 폐기하고 스스로의 훈을 만들 필요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논리가 다시 우리를 잠식하기 이전에 주변의 훈을 바꿔나가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대학생도, 회사원도, 한집안의 부모들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훈은 없어지지 않는다. 언어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수반하며, 그 시대의 가치관과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산물이다. 구속과 통제와 강요도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학교의 목적 중 하나는 사회인을 길러내는 것이며,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든 뭘 하든 목적성이 있는 집단이며, 광고는 궁극적으로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게 오래된 훈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교사와 학생이 힘을 합쳐 ‘여자다워라’라는 교가를 바꾼 강화여고의 사례, 기업 문화를 개선해나가는 젊은 기업들의 움직임, 최근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는 광고 문구로 호평을 받고 있는 나이키 브랜드의 사례 등 언어를 전복시키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작가 ‘김민섭’이라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가장 기대고 있는 지점이다. 작가이자 대리기사로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따뜻하게 통찰해오고 있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강단에서 쌓은 지식들이 다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삶의 현장을 더 잘 이해하고 낫게 바꾸기 위함이라는 사실에 퍽 안도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글은 날카로우나 무척 따뜻하다. 『훈의 시대』는 그가 던지는 ‘훈훈한’ 행동에의 촉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