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마시는 남자 2

Editor. 유대란

몸에 나쁘고 후회가 예정된 일들에 투신한다.
소독차를 보면 쫓아가고 비 오는 날 나는 기름 냄새를 좋아한다.
위스키에 나물 안주를 먹을 때 행복하다.

‘한잔 하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입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 중 목적어가 고체면 ‘먹다’, 액체면 ‘마시다’라는 동사를 주로 쓰지만, 종종 ‘마시다’는 ‘한다’로 대체되기도 한다. 특히 술일 때. ‘소주 한잔 하자’, ‘한잔 해’라고 권유해본 적 있다? 없다? ‘술을 먹다’라는 표현도 있다. ‘먹다’는 목으로 넘겨서 위장에서 소화하는 일련의 즉물적인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표현 같다. ‘마시다’는 취함을 목적지로 달려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종종 ‘달리다’라는 표현도 쓰이는 걸까. 한편, ‘하다’는 취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품은 능동적이고 의식적 행위에 가깝다. 누군가 ‘한잔을 한다’라고 말할 땐 그것이 벌어지는 시간, 장소, 주체 등 그 맥락의 총체가 거기에 담겨 있는 듯 들린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거다. 부어라 돌려라 마셔라의 양맥이 횡행하는 회식자리를 제외하고는 만취를 향해 들이붓는 그림이 잘 성립되지 않는다. 이 술은 흥겨운 술의 신 바쿠스보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였던 바쿠닌 같은 반골들에 어울린다. 『시장과 전장』의 기훈 같은 인물들이다. 위스키를 ‘하는 게’ 어떤 관념적 갈등이 임박한 순간에 행하는 엄숙한 의식마냥 느껴지는 사람들.
1950년대 해방과 전쟁기를 그린 『시장과 전장』은 지영과 기훈이라는 두 주인공을 통해 격변기에 삶과 자율성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의 삶을 탐구한다. 지영과 기훈은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이 시대를 경험하는 데는 낙차가 있다. 두 사람은 시장과 전장이라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전쟁과 혁명을 겪는다. 지영이 격변기 수난 속에서 가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생활인이라면, 기훈은 급진적인 코뮤니스트로서 자신이 믿는 이념에 투신하는 관념론자다.
생활과 이념, 둘 사이의 간격은 사회적 수난기에 첨예해진다. 생존이 어려울수록 생활인들은 이념에서 멀어지고, 혁명가들은 관념적 이상에 집착한다. 타고나기를 고독한 에고이스트로 나고 자란 지영은 남편과 자식을 뒤로하고 타향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발발한 후 가족과 재회하지만, 남편이 납북된 후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게 되며 가족에 대한 애정을 회복한다. 한편 지영의 시아주버니인 기훈은 전쟁 발발 후 인민군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석산 선생을 인민재판에 넘길 정도로 이념에 헌신한다. 대부분의 이상주의적 지식인들이 그렇듯 기훈 역시 이념적 이상향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는 허무를 품고 있으면서도 신념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 기훈은 비록 인간보다 이념을 더 믿는 냉소주의자이기를 자처하지만, 이념에 앞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화를 알게 되며 갈등을 겪는다. 기훈의 내적 갈등이자 당시의 시대적 갈등은, 모든 극단적인 것은 파괴를 불러온다고 믿는 기훈 주변의 지식인들의 논쟁을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기훈의 스승이었던 석산 선생은 기훈을 이렇게 타이른다.
“커뮤니스트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완강한 믿음이 있지.
마치 예수쟁이가 하나님만을 믿는 것처럼.
그들은 이론이나 교리 형식에 미치지만
그 까닭으로 그 외 것에 사랑을 느끼지 못한단 말이야.”
자신을 흔드는 모든 것에 단호하고 잔인하게 대처하는 기훈의 자세는 서로 다른 이념이나 계급의 양극 사이에 아무것에도 가담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많은 개개인을 향한 온화한 마음이 없지 않음을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가화를 대하는 자세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기훈이 내적 분열을 앓다가 잠시 평범한 생활인의 문턱에 발을 살짝 들여놓을 때나,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스스로 강화할 때나, 거기에는 위스키가 있었다. 길에 쓰러진 가화를 구해서 둘이 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위스키 티를 권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두런두런 들려주는 도중 캐나디안 위스키를 마시다가 돌연 본분을 깨닫고 떠난다. 가화는 죽고 기훈이 지향했던 관념 속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지만, 단독의 혁명가가 그리던 이상 속엔 위스키가 있던 작은 풍경들도 분명히 스쳤을 것이다. 혁명가이기 전에 사람이고 연인이었던 순간들도. 나는 이런 기훈을 위해 건배하고 싶다. 한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