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19

우리에게 책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Editor. 지은경

책으로 무엇을 할수 있을지, 책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만 생각합니다.
거창한 작가나 평론가는 아니지만 책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그 마음이 우리 책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애머런스 보서크 지음
마티

책을 많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언제나 그만큼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독서량에 좌절하곤 한다. 그렇지만 종이책은 그저 읽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라는 게 내 의견이다. 서점에 가서 책의 냄새를 맡고, 몇 권 들어 보기도 하고, 예쁜 표지 디자인과 강렬한 타이틀에 이리저리 이끌리다가도 어디선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앉아있었다는 듯 눈에 들어오는 책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은 책과 연관된 매우 소중한 순간들이다. 제목과 머리글을 읽으며 책의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정성스럽게 고른 짧은 단어와 문장들이 내게 던지는 느낌을 통해 나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과 물음들로 채워진다. “나는 집으로 책을 데꾸온다.”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사서 가지고 오는 게 아니라 ‘데꾸오는’ 것이다. 표준말인 ‘데려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어린 시절, 나와 눈과 맘이 철썩 맞은 친구를 집에 ‘데꾸오는’ 것처럼 어수룩한 표현을 쓰고 싶다. 왜냐면 내게 책은 죽은 사물이 아니다. 그 순간 내가 궁금했던 것, 알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을 들려줄 친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막상 집에 데꾸오니 당장 책을 읽지 않아도 며칠이고 몇 주고 책은 침대 머리맡, 책상, 소파 위, 식탁 위에 무심코 올려져 있다 한들 상관없다. 내가 그의 존재를 계속 인지하고 있고, 당장 이야기를 듣진 않지만 내게 그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곧 찾아올 것이라는 행복한 기다림이 나를 설레게 한다. 또 책의 타이틀이 몇 번이고 나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아직은 잘 모르는 주제더라도 ’나는 곧 너를 읽을 거야’ 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는 일종의 희망과 자애를 느끼게도 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게 되면 나와 책 사이의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된다. 나는 책과 싸우기도, 사랑하기도, 속삭이기도, 같이 울기도 웃기도 한다. 읽을 때만큼은 베스트프랜드가 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내 삶에선 매우 중요하고 큰 요소다.
이 제목도 긴 책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은 책을 4가지 카테고리로 야무지게 나누어 놓았다. 나는 이 책의 카테고리를 미술사와 비교하며 읽게 되었는데, 너무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장 ‘사물로서의 책’은 책이 가진 물성의 변화와 형태의 변천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 부분을 읽게 되면 책이라는 사물이 가진 너무도 매력적인 형태와 촉감, 귀중한 보물이자 예술로 존재하는 책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무겁고, 두툼하고, 거대한 사물이었던, 기술 발달 이전의 책은 하나의 유일한 예술작품이자 생각과 그림을 기록하는 생활용품이었다. 주술과 종교, 생활도구의 일환으로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던 원시미술이 점차 디자인이라는 옷을 입고 시대와 유행에 따라 모습을 변화했듯, 책의 변천사를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목격할 수 있다.
제2장, ‘내용으로서의 책’에서는 물성의 역할을 충분히 하던 책이 인쇄술과 산업의 발전과 대량생산, 서점의 등장과 함께 일정한 규격 상품이 되며 내용이 독자들을 자극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펼친다. 이와 동시에 가볍고 작은 보급판 페이퍼백의 등장으로 책은 보다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종이와 잉크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책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예술의 혁명이 책에서도 온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마치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 변기를 뒤집어 놓음으로써, 즉 물성으로의 작품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관념이 소름 끼칠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다시 제3장에서 이렇듯 인쇄 기술이 발달하고 수많은 예술가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새로운 예술의 형식인 아티스트 북과 실험적인 예술 서적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미술사의 흐름처럼, 산업화 이후 부를 축적하며 관념 예술에서 관념과 물성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스타일, 즉 폴록이나 바스키아, 워홀, 호크니 등의 다양한 작가의 작품 아이디어가 우리를 신세계로 초대하듯, 책과 예술의 경계에 서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띤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에게 적잖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제4장은 인터페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형태가 변화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 많은 것이 변했다. 사진의 등장으로 우리는 그림이 사라질 것이라 염려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이 모든 필름 카메라와 필름 사진이 소멸될 거라 예언했지만 아직도 세계의 사진 거장들은 필름 사진만 고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책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며, 특히 그것이 매력적인 지성의 냄새를 담은 종이책일 경우 그 수명은 우리의 생각보다 오래갈 것이 분명하다. 물론 수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대신 종이책으로 태어나는 책들은 유행 따라 생겼다 소멸하는 쓰레기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남아 있어야 좋을 귀한 작품들만 나무의 신세를 지며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니, 나무 많이 안 잘라 좋고 쓰레기 같은 책들 줄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