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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9

우리들의 연애

Editor. 이희조

지식과 지혜가 함께 자라길 바라는 잡식 독자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의 여유를 지키고자 악착같이 노력합니다.

『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창비

만날 때마다 맨날 연애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는 친구가 있다. 가끔 ‘머릿속에 연애 생각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술자리 분위기가 조금은 더 달아오르기에 그런 친구 하나쯤 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애’라는 안주가 나왔으니 다들 한 젓가락씩 얹기 시작한다. A가 먼저 입을 뗀다.
“사랑을 기승전결의 패턴에 넣는다고 생각해봐. 그런 사랑에는 매혹이 없어. 패턴을 깨야지. (…)예술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패턴을 깨는 것이야. 배신하는 것. 과격할수록 혁명적이라고 칭찬을 받아. 근데 현실에서는 보통 그것을 나쁜 짓이라고 부른단 말야. 혁명을 행동으로 옮기면 나쁜 남자가 되고. 결과적으로 모든 나쁜 남자들은 세상의 패턴과 성스러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지.”
A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럴듯한 논리로 술자리에서 주변을 제압하길 잘한다. 어떤 단체에 속하든 그 단체 안에서 예외 없이 연애 관계를 맺는다는 특징이 있다.
B는 A의 말에 자기 주변 친구가 겪은 일이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 친구는 3년 사귄 남자친구와 아주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갔다. 남자친구는 그동안 서로 바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터라 되도록 비행시간이 긴 도시를 목적지로 택했다고 말했고, 여자는 무척 행복해했다. 공항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남자친구와 비행기를 간신히 탔다. 그런데 비행기에 앉은 순간, 선반에 가방을 올리는 그의 벌어진 재킷 안으로 그의 가슴께가 보였고 안주머니 속 은색 귀고리 하나를 보고야 만다. 그 순간 여자는 남녀가 키스를 하다가 여자의 귀고리 한 짝이 벗겨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비행기는 곧 출발할 예정이었고 둘은 장시간 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B는 A에게 이런 것도 패턴을 깨는 행위냐고 비웃듯이 묻는다. A는 크게 웃는다.
C는 최근 자기가 듣는 소설 수업에서 흥미로운 과제용 텍스트가 있었다면서 대뜸 말 이야기를 꺼낸다. 말 교배소에서 ‘시정마’라고 불리는 작고 못생긴 말의 이야기인데, ‘정사를 시작하는 말’이라는 뜻 그대로 암말을 흥분시키는 용도로 이용된다. 교배소의 목적은 암말을 몸값이 아주 비싼 종마와 교배시켜 비싼 종마를 낳는 것이지만, 교미 전 암말이 난폭해져 종마를 다치거나 죽게 할 위험이 있어 종마 대신 시정마에게 전위를 맡기는 것이다. 배에 풍선을 단 듯 아주 커다란 콘돔을 찬 시정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현란한 기술로 암말을 유혹하지만, 암말이 절정으로 달아오른 그 순간 사람들의 몽둥이질 속에 강제로 끌려나간다. 자극적인 소재에 분위기는 더욱 달아오르고 시정마를 불쌍히 여기는 여론이 들끓는다. “아니야,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시정마가 제일 행복할 수도 있어.” 누군가 농담조로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과거 ‘X’들이 얼마나 사랑 앞에 비겁했는지 토로하는 성토 대회가 한동안 이어진다.
이때쯤이면 다들 꽤 취기가 올라 있다. D는 일명 A→B→A’→B’→A’’→B’’…의 반복 패턴을 제시한다. 항상 새로운 연애는 직전에 만났던 상대와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과거의 연애 경험을 종합해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연애 상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지만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정도로 마무리된다. 술값을 누가 계산했는지, 몇 시까지 누가 남아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술자리 중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위는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에 등장하거나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한 마디로 술 냄새 나는 책이라고 표현하고픈 이 책은 당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평범하고 찌질하고 고독한 우리 모두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의 패턴의 노예가 된 자, 그것을 거스르려는 자, 거스름을 당해 절망에 빠진 자, 절망이 고독이 된 자 등 모든 젊은 우리 사랑에게 바치는 책이다.
오 젊은 사랑 그것은
너무도 잔인한 것
어린 맘에 몸을 실었던
내가 더 잔인한가
모든 게 잘못돼서 죽어 버릴 듯
위태롭던 우리 일 년은
눈물과 거짓말이 배어 나오던
수많은 상처들만 남겼다
—검정치마, ‘젊은 우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