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5

어쩌다 마주친 잡문들

Editor. 지은경

거대한 사회 속에서 규율을 잘 지켜가며 살도록 프로그래밍된 우리에게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틀을 거부하거나 깨부순다는 것, 이미 잘 차려진 도시의 근사한 밥상과 안전장치들을 멀리하고 위대한 자연 속에서 홀로 생존한다는 것, 우리의 길들여진 미의식을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허공에서 뜬 구름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좋은 것도 알고, 옳은 것과 이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지만, 그것이 실생활과 연결되었을 때 오는 괴리감을 무시할 수 있는 일반인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슬기롭고 멋진 생존을 위한 방법들을 나열해놓은 책들을 한번 읽어보자. 그리고 그것이 진정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며 어려운일이기만 한지 다시 한 번 고민해보자.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로베르 브레송 지음
동문선

허핑턴포스트의 슬라이드 쇼에는 사람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반면 매그넘의 사진에는 남겨지고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 보는 사람들에게 전자는 공포와 분노를 주는 데 반해 후자는 슬픔을 준다. 전자는 엄청난 속도로 공유되는 반면 후자는 퍼지지 않는다. (…) 빈곤과 같은 사회현상에 대한 슬픔은 미묘하고 복합적인 감정이며 이성적인 분석을 동반해야 정당화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슬픔은 느린 감정이다.—본문 중
대중은 알기 어려운 존재다. 우매하고 선동하기 쉬운, 대략 중학생의 지식수준을 지닌 것으로 모형화되는 이 집단은 때로 예상치 못한 숭고한 일을 해내기도 하고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들은 소비자, 유권자, 지지자 등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어린 양처럼 순진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 주체적이고 대단히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대중의 모순되고 복잡한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저자는 대중 유혹의 기술 중 성공적이었던 사례를 나열하고 분석을 내놓는다. 거기에 언론에 몸담으며 대중과 미디어를 관찰하고 분석한 저자 자신의 해석과 전략을 제시한다. 저자는 독자를 미디어 역사의 여러 현장으로 인도한다. 19세기 파리의 시체 공시소에는 하루 평균 2만 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당대의 신문들은 이를 소재로 기사와 시각자료를 생산해내며 도시생활자의 공포와 흥분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한편, 1929년 뉴욕에서는 여성권리 신장을 위한 부활절 담배 행진이 열렸다. 아름다운 여성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흡연의 자유가 곧 여성해방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한 이 행사는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의뢰를 받은 전설적인 전략가 에드워드 버네이즈의 걸작이었다. 레드불이 올해 개최한 치바현 에어 레이스도 일본인의 뿌리 깊은 욕망을 건드렸다. 레드불의 비행기가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본인들은 70년 전 자국의 제로센 전투기의 영광을 거기에 투사했다. 여러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풍부한 사례를 읽는 사이 우리는 소비사회 속 대중의 욕망이 작동하고 조장되는 원리에 다가간다. 누구든 ‘대중’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려 들지만 바로 거기서 우리는 개개인 본연의 더 솔직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비채

만약 세상에 종말이 닥쳐온다면 우리가 현재 소중히 여기거나 움켜쥐고 있는 것들은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이나 기술은 당장 급하게 사용되지는 않아도 종말이 닥쳤을 때 우리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종말이 찾아왔을 때’라는 절망적이고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책은 예쁜 삽화들과 무겁지 않은 문체들로 채워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말이 찾아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책마저 절망적이고 무겁다면 우리의 생존 의지와 확률이 저하할 것이 분명하다. 본문 중 눈에 띄는 내용은 “만약 손님이 찾아온다면 3일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할 것”, 왜냐하면 3일 이상이 지나면 주인행세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도서관을 만들고 씨앗을 저장하고 걷고 텐트와 매듭을 만들고, 숙면하는 등 생존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서도 알아두면 유용한 기술이나 우리의 생활방식을 좀 더 심플하게 바꾸어줄 수 있는, 그래서 본질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도와주는 내용과 팁도 상당히 많다. 절망은 암울하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오며 받은 단 하나의 소명이다. 어떤 상황이 찾아올지라도 끝까지 명랑하자. 그래야만 새로운 통찰력과 아이디어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뿐이 아닌 일상에서도 통하는 진리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명랑하자.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 보다 많은 가능성과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사람의 못난 점 가운데 으뜸은 평생 가공할 만한 쓰레기와 먼지를 제조하는 것, 그다음은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엄격하고, 소홀하고, 잔인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숱한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운이 좋으면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소중한 이들을 잃는다. 이런 실수와 죄책감의 순환에서 누군가는 교훈을 얻지만 나 같은 범인들은 오히려 심드렁함을 배운다. 타인에게 심드렁함으로 일관하며 최소를 기대하면 실망할 일도 적다는 점을 체화한다. 마음을 쓰는 데도 효율의 게이지가 있다면 아마 1등급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겐 이병률의 문장은 지나치게 뜨겁고, 달콤하고, 마음 씀의 ‘효율’이 낮다. 그래도 자신의 순수함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다면, 타인의 마음을 한 번 더 믿어보고 싶다면 그의 여행산문집을 윤활유 삼아보기를. 우리 모두가 그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여기고, 일상을 여행의 연장으로 여길 수는 없겠지만, 여행을 통해 가까웠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법을 배우고 새롭게 마주치게 된 것들에 보내는 시인의 풋풋하고도 기대 어린 시선에 젖어볼 수 있다.
“알고 있겠지만, 여행은 사람을 혼자이게 해. 모든 관계로부터, 모든 끈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는 순간, 마치 아주 미량의 전류가 몸에 흐르는 것처럼 사람을 흥분시키지.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풍성한 상태로 흡수를 기다리는 마른 종이가 돼.” —본문 중
시인은 계절의 변화를 예찬하고, 돌고래와 이야기하고, 우연히 마주친 남녀 사이를 짐작해보고, 역사의 작은 공간에 책을 몰래 갖다둔다. 섬세한 시어들로 이루어진 그의 문장들은 소리내 읽어보아도 좋다. 그의 문장들은 운율이 살아있어서 리드미컬하게 읽힌다. 간결하고 말간 느낌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시인의 순수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시선에 마음이 가닿는다. 다시금 맑고 미숙했던 시절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주문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병률의 문장을 닮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