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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1

어린이가 사라진 세계

글.최재천

SF 전문출판사 아작 편집장.
“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_ 조 월튼


『사람의 아이들』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아작

“2021년 새해 첫날, 자정에서 막 3분을 넘긴 늦은 시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한 술집에서 소동이 일어나, 지상에 마지막으로 태어난 인간이 25년 2개월 12일을 살다 살해당했다.”
두 해 전 출간했던 P. D. 제임스 작 『사람의 아이들』의 첫 문장이다. 팬데믹이 강타한 2020년은 여러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충격적이었지만, 대한민국 인구사에서도 변곡점을 찍은 해로 기록될 것 같다. 2021년 새해가 밝자 유수의 언론이 앞다투어 쏟아낸 기사 제목들은 이런 식이었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인구가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자연 감소!” “신생아 30만 명 선마저 붕괴!” “15년간 저출산 대책에 225조 원을 썼지만…” 기시감이 느껴져 기억을 더듬다 이 소설이 떠올랐다.
『사람의 아이들』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류는 재생산 능력을 잃은 지 오래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진 25세 남자가 살해되면서 25세 이하의 인간, 즉 어린이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 그 자신의 소멸에도 치욕스럽게, 또 자연스럽게 적응해간다.
“먼저 공원의 놀이터가 철거되었다… 그네는 모두 단단히 줄로 묶여 고정되었고, 미끄럼틀과 정글짐은 더 이상 새로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그러다 종내는 없어졌다. 아스팔트를 깐 놀이터도 작은 공동묘지처럼 잔디로 덮거나 꽃을 심어 버렸다. 장난감은 모두 불태웠다.”
사실 인류 멸종은 SF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다루는 SF 장르의 일반적인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이야깃 거리일 테다. 아예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하위 장르를 형성할 정도다. SF 작가들이 그려온 인류 멸종의 시나리오는 흔하게는 전면적 핵전쟁이나 전염병,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거대 운석의 충돌에서부터, 조금 독특한 것으로는 미래 인류가 보내온 거대 지렁이가 지구상 모든 인공물을 먹어 치운다거나(정세랑의 「리셋」), 남자들이 여자를 죽이면서 인류 스스로 멸종하는 등(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나사파리 구제법」) 다양하다. 하지만 그 원인과 줄거리는 다르더라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류의 멸종은 폭력적이고 즉각적이며 갑작스러운 위기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아이들』은 특별하다. 작가는 인류의 소멸 과정을 평화롭고 조용하게, 또 느리게 그려낸다. 알폰소쿠아론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에 첨가된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적 서사도 없다. 이 소설에서는 국가를 구원하겠다는 독재자도, 그에 저항하는 일군의 무리도, 심지어 이런저런 소소한 고난 끝에 새로운 인류의 싹을 구출한 주인공마저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인 인간들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러했듯이, 그는 말년에 쓴 단 한 편의 SF인 이 소설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루한 존재인지, 자기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때조차 유혹 앞에서 얼마나 끝없이 갈등하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발기불능이 찾아온 음탕한 호색한처럼 우리는 내면에 간직한 신념의 한가운데에 큰 상처를 입고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겨우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하필 2021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생각하니 2021년 한국의 현실이야말로 기막히게 소설 같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0명대의 출산율에 접어들었고, OECD 평균 대비 4배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 오랫동안 있었던 팬데믹에 대한 우려와 상상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이 닥쳤을 때 세계 어느 곳도,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목도했던 것과 더불어 말이다. 2019년 출간 당시에 내가 쓴 보도자료는 지금 보니 조금 신이 난 말투다. “인류가 마침내 재생산 능력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불임이 되었다!” 팬데믹이나 출생률 0명대는 소설 속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불과 이 년 전의 문장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