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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1

약손으로 살아남기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보이지 않은 역사』
주윤정 지음
들녘

안마는 이 사회에 사는 시각장애인들의 주된 생존 방법이다. ‘생존’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못살던 시절, 실제로 밥을 굶던 때를 지난 지금, 끼니를 때우는 것 자체가 많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생의 과업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더 높은 이상, 자기만족, 자아실현까지 바라보아야 오히려 권태롭지 않은 시대인지라, 생존은 옛날 이야기 같기만 하다. 하지만 어떤 시대에서도 생존이 가장 큰일인 사람들은 있었다. 이제는 살만한 사람들이 자신의 서바이벌 모험담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과 달리, 항상 생존이 1순위인 누구들은 말이 없다. 하지만 안마를 전통이나 민간요법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엔 찜찜하고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양가적인 마음으로 안마와 시각장애인에 관한 책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보이지 않은 역사』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공동체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에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가 많았다.
아시아 전반에 다양한 모습으로 퍼져있는 안마문화가 시각장애인과 연관되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몇 군데만의 사정이다. 한반도에서 시각장애인이 안마업에 종사하게 된 자초지종은 한국의 역사 전체와 궤를 같이한다. 저자가 지적하듯 시각문화로 대표되는 서구식 근대를 갑자기 받아들이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근대화기 조선의 시각장애인은 이전과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전통적인 미신에 따라 한반도에서 시각장애인은 영험한 능력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졌고, 신분을 막론하고 대부분 점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조선에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쓰여있기도 할 만큼, 점쟁이로서 시각장애인들의 수입은 짭짤했고, 조선 사회에서의 입지 또한 확고했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상황이 급격히 달라진다. 식민지배기간 동안 일본과 이후의 미군정은 미신타파를 주요 기치로 세웠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은 개종한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치는 일을 그만하도록 설득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존을 위해 점복업을 계속하는 시각장애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일본의 안마, 지압 문화가 조선에 도입된다. 이후 일본이 총독부 근처에 세운 맹학교에서 직업교육으로 안마를 가르치게 하고, 안마업은 ‘개화’된 시각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강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각장애인들은 생존을 위해 ‘근대적’ 시나리오에 맞는 그들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
옛날 시각장애인들은 도제식으로 점치는 방법을 공동체 차원에서 가르치고 제자를 키워왔다. 이것이 대한민국 시각장애인 역사의 독특한 결을 만든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노조나 안마업 관련 협회를 통해 이들은 지금도 업계 내의 성매매 근절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영향으로 시각장애인의 안마업 독점이 보장되어 있던 대만에서는 현대에 관련 법률이 폐지된 데 반해, 한국에서 있던 같은 내용의 소송은 결국 시각장애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요인이 시각장애인들 간의 공동체와 연대, 그리고 그들이 이룬 사회적 역할이었음을 강조한다.
책을 읽으며 내가 처음 만난 시각장애인이 떠올랐다. 어둑한 안마원에서였다. 안마를 받는 내내 안마사가 시각장애인인 걸 몰랐다. 그는 내게 어디가 불편한지 묻고 손으로 적당한 곳을 찾아 사정없이 눌러주었다. 안마가 끝나고 천천히 안마사 대기실로 향하던 뒷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알아챘다. 주저함이라곤 없는 약손, 어디 어디가 심하게 뭉쳐있다던 말, 안마원 안쪽에서 들리던 왁자한 수다 소리. 잠깐 목격했던 그들 삶과 자부심의 깊은 뿌리를 이 책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문자문화 위주의 세상에서 이들의 오랜 생존의 이야기가 구술이라는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목소리와 말씨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희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