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19

악명 높은 소설

Editor. 박중현

사적으로 고른 책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불친절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조금 더 친절하게 가닿을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당분간 신간 한국소설을 더듬습니다.

『연대기』
한유주 지음
문학과 지성사

한유주는 유명 작가다. ‘인기 작가’와는 다른 표현이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녔던 내 대학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이미 한유주는 유명했다. 그러나 소위 ‘뭔 소린지 모르겠는’ 소설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실제로 읽은 이는 정말 손에 손을 꼽을 정도였는데, 희한하게도 ‘한유주 안다’는 사람은 많았다. 나아가 “나 한유주 좋아하는데” 라고 밑도 끝도 없이 새침떼게 툭 내뱉으면 벌써부터 뭔가 있어보이는 취향을 구축한 듯한 이미지를 풍길 수 있었다. 영화 <타짜> 속 정 마담 김혜수의 명대사 “나 이대 나온 여자야”의 파괴력까진 아니지만 암튼 그랬다. 어쨌든 ‘한유주’라는 이름이 이처럼 하나의 대명사 혹은 장르처럼 불리는 데에는 ‘읽기 어렵다’는 사실이 있다.
딱히 불행하지는 않다. 다만 행복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전에도 안 적은 없었다. 다만 짐작했거나, 착각했을 뿐이었다. 실은 불행이 무엇인지도 알지는 못한다. 다만 불행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고,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느낀다. —「일곱 명의 동명이인들과 각자의 순간들」
읽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는 기존의 문법에서 나아가는 어떤 이야기나 주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존의 문법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데 관심 있다. 여기서 ‘문법’이란 사회의 일반적인 보편 의식이나 감정은 물론 통상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 거두고자 하는 효과까지 포함한다. 쉽게 말해 대충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활자 경험이랄지 기승전결의 구조랄지 이야기의 선정성이랄지 하다못해 반전이나 감동이랄지인데, 그는 여기 관심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의심’한다. 그런 것들이 진실한지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정말 그런 것들을 대표했는지에 대해서. 그런 그가 작가로서 택하는 방식은 분절이다. 그는 알아보기 위해 쪼개고 떼어낸다. 명사도 동사도 의심한다. 이름은 제대로 불리웠는지 행동은 제대로 옮겼는지 검증한다. 형용사 ‘따위’는 궁극적으로 주관의 영역이므로 거의 등장도 안 시킨다. 이야기나 연대 속에 묻힌 개인의 진실을 틔워 올리기 위해서다. 무슨 피곤한 짓이냐고 하겠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묶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 내지 유실에 관해서이다. 소실되는 것은 구체적 개인이다. 물론 연대의 힘은 긍정하고 존중하기 마땅하다. 기표만으로 이만큼 호감을 일으키는 ‘착한’ 단어도 몇 없다. 그러나 사슬이 되는 순간 철의 이력은 지워진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단지 객체로서 스러져 가는 개인만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감각하는 삶의 실재에 대해 묻기도 한다. 일상 속 바쁜 현대인이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표현은 실로 빈곤하다. 피곤해, 바빠, 아파, 외로워. 하루 혹은 요즘 혹은 삶 전체를 뭉뚱그려 퉁 치는 소극성이랄지 태만은 둘째 치더라도, 설사 그 한마디로 정말 족하다 치더라도, 정말 정확한 표현일까? 의심해본 적은 있을까? 손톱만큼 썩은 토마토는 과연 썩었다고 해야 할까, 썩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도트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도트가 작을수록, 그리고 도트가 많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해상도가 높은 글을 쓰라고 했다. 수강생 하나가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를 그리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너는 반구상화나 추상화에도 해상도가 있다고 대답했다. (…)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려고 네게 다가간다.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너를 통과한다. 나는 너를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몇 개의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가.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게슈탈트 붕괴Gestaltzerfall라는 말이 있다. 지각 현상 중 하나로, 정리된 구조Gestalt에서 구성이 분리되어 각각의 부분을 인식할 때 겪는 경험이다. 의미 과포화 현상이라고도 말하며, 쉽게 말해 한 단어를 오래오래 바라보면 문득 어색하게 느껴질 때 겪는 그것이다. 과도하게 정보를 해석하려 할 때 겪는 감각기관의 피로와 혼란이다. 그러나 실은 이 피로와 혼란은 일상의 관성에서 일탈해 그간 보지 못했던 개별적 실존에 대해 감각해보려는 노력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 속 표현에 기대자면 ‘도트’를 보려는 노력이자 ‘해상도’ 를 높이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는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적합성을 놓고 판단해 설정하는 일종의 문학적 값이다. 인류의 단위로 과감한 제언을 던져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터럭 하나에도 돌아보아야 하는 순간이 인생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한유주의 소설이 해상도가 높은 글이냐고 묻는다면, 판단은 읽은 후의 감상으로 남기겠다. 다만 『연대기』가 단지 연대의 서사를 좇기보다 무엇이 연대하고 있는지에 더 관심 두고 있는 소설임엔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