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las of Life : 삶의 아틀라스

아무도 영원히 꺾을 수 없다

에디터. 정현숙
자료제공. 픽션들
사진. ⓒ 장우철

사진작가 장우철은 꽃을 완전함으로 인식한다. 색약인 그에게 꽃은 명확히 색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피사체이다. 설령 색을 정확히 못 알아본들 꽃은 언제나 자기만의 고유한 색으로 피어나니까. 헷갈릴 일이 없으니까. 이는 작가로 하여금 ‘꽃은 완전하다’에서 나아가 ‘꽃은 안전하다’까지 가닿는 이유가 된다. 아네모네는 아네모네대로, 클레마티스는 클레마티스대로, 달리아는 달리아대로. 더하거나 덜어낼 것 없이 완전한 꽃은 보이지 않는 결핍까지 기꺼이 껴안았다. 장우철 그 자신 그대로의 삶을 살게 했다. 불완전함까지 품기에 완전한 것. 이것이 꽃이 옹호하는 아름다움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어떤 날엔 내가 꽃에게 가고, 어떤 날엔 꽃이 내게로 온다. 그것은 지켜지는 법칙이라기보다 일어난 마법 같다."
완전한 걸 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린 소년을 꽃 앞으로 데려갔다. 열네 살 때부터 스타티스니, 금어초니, 난잎 같은 꽃들을 들여다보고, 그 이름을 하나씩 알아온 장우철은 여전히 꽃에 주목한다. 바깥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만 찍는 건 아니다. 꽃시장에서 직접 골라 사온 꽃들도 찍는다. 이 경우엔 어떤 형태로든 그저 놓아둔 채로, 3일 정도 잊은 듯 기다린다. 그러면 꽃들은 저희들끼리의 어떤 질서와 균형을 이룬다. 꼭 한 교실에 있는 아이들처럼, 한 명 한 명이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난다.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다른 꽃을 휘휘 감아 숨 못 쉬게 한다거나 기어이 기대고 올라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거나. 하지만 그 어떤 불완전한 움직임조차 꽃은 감추지 않는다. 불완전한 것들로 공전하여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장우철은 그런 꽃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다.
『a boy cuts a flower: 소년전홍』은 그가 온통 마음 빼앗긴 순간으로의 초대이다. 철저히 꽃 앞에서 쓰인 책이라는 뜻이다. 책의 한글 제목은 18세기 조선의 화가인 혜원 신윤복의 작품 〈소년전홍〉에서 따왔다. 젊은 유생이 여인의 손목을 잡고 유혹하는 모습을 ‘붉은 꽃을 꺾는’ 행위에 비유한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대치의 긴장 혹은 뜨거운 떨림은 그대로 둔 채, 장우철은 다만 그 말의 어감만을 ‘꺾는다’. 꽃이 전하는 위로, 꽃의 무심함, 꽃의 포옹, 꽃의 거절, 꽃의 고요, 꽃의 수선스러움, 꽃의 아무렇지 않음…. 자신이 목격한 꽃의 한 시절을 오롯이 전하기 위해 그는 사진을 ‘잘라낸다’.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더 꺾는다. 그것은 ‘크롭’이었고 ‘줌’이었으며, 꽃에게 한 번 더 다가가려는 장우철의 몸짓이었다. 이때 번지고 무너진 꽃은 부족함이 아니라 골라내어 완성한 장면이 된다. 그러나 장우철의 꽃 사진은 어디까지나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분명 꽃이면서도 꽃밖의 무언가, 마음이거나 얼굴이거나, 찰나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맥락이 제거 된 순간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영원한 것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꽃을 꺾는 순간만큼이나 짧아서 마음 한 켠에 박제되었을까? 이 긴 여운은 언제쯤 처분될까?
"요컨대 나는 누구에게든 각자의 꽃이 있을 거라 말하고 싶은 건가. 꽃 앞에 카메라를 들고 생각하길, 무슨 꽃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기를. 나라서 가능한, 불가결한 꿈이 빛과 만나기를. 나의 가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은 피고 또 진다."

April23_AtlasofLife_10

Please subscribe for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