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아름다움(Beauty)

에디터: 유대란, 박소정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더 그레이트 뷰티’(2013)에서 주인공 젭 감바르델라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삶을 산다. 로마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는 장대한 콜로세움이 멀리 내려다 보이고, 그의 삶은 화려한 파티와 진귀한 예술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65번째 생일을 맞은 해에 그는 문득 덧없음을 느낀다. 첫사랑의 부고를 듣자 젭의 상실감은 깊어지고 여태껏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다시 고찰해본다. 소렌티노 감독은 로마를 거니는 젭의 시선을 통해 도시를 채운 위대한 유적과 명작들을 보여준다. 불멸할 것 같았던 고대 로마의 예술작품들은 소멸해버린 젭의 젊음, 첫사랑, 열정과 나란히 비교되고, 때로 대조를 이룬다. 관객은 젭의 시선을 따라가며 영원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또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래 간직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영화는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객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아름다움에 다가가보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영화 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과 주인공의 찬란한 젊은 날 속에서도 관객은 아름다움의 불분명한 속성만을 자각한다. 소렌티노는 아름다움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통해 그것을 정의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논의해온 ‘아름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재 여부가 의심스러울 만큼 정체가 여전히 불분명한 것은 그것이 시대, 문화, 인종별로 다른 모습과 의미를 취해왔고 현재에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오랜 논쟁
우리가 어떤 대상을 두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이 자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을 표현하는 걸까. 아리송한 문제다. 객관적 미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그리고 자체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 한편,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입장이 달랐다. 그는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대상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움의 객관성과 주관성에 관한 논의는 역사가 길다. 기원전 6~4세기,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조화로움이었다. 그들은 조화로움이 규칙에 의해 생겨나며 규칙은 비례, 비례는 수치, 즉 숫자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즉 조화, 비례, 숫자가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전제였다. 이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우주의 근본적 속성이었다. 그것은 애초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닌 발견한 것이며,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자연이 지닌 선천적 아름다움을 표본으로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소피스트들은 이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표방했던 소피스트 철학자들은 선악, 진실과 거짓의 기준이 상대적이듯이 아름다움의 기준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가령 같은 옷을 입어도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같은 대상을 두고서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추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소피스트들의 재미있는 표현이 전해진다. “개는 개를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다. 황소는 황소를, 당나귀는 당나귀를, 돼지는 돼지를 가장 아름답다고 여길 듯이.” 이들에 이어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입장을 절충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대상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대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각 대상이 목적을 지녔음을 전제로 했다. 피타고라스학파가 비례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은 것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대상의 목적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각 대상이 생겨난 목적이 서로 다른 만큼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는 그것이 지닌 광택이나 희소성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지만, 금으로 만들어진 창은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즉 유용함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는 얘기다.

유럽 역사를 통틀어 미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가 주장한 객관적 미의 기준에 동의했다. 플라톤은 아름다운 것 중 비례를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미를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감각이라고 주장했던 소피스트들과 달리 그는 인간의 이성이 아름다움을 주관한다고 했다. 스토아학파도 플라톤과 입장을 같이했다. 그들은 정신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이 감각에 의거한 비이성적이고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나 감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감각은 훈련을 거쳐 객관성을 지니게 될 수 있으며, 그것이 미에 대한 객관적 지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간주했다. 이후 에피큐리언학파와 회의학파처럼 주관적 미를 주장하는 이들이 다시 등장하며 객관이냐 주관이냐의 논쟁은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며 발전하지만 객관론이 대체적으로 우세했다.

이런 두 가지 입장의 대립과 발전은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대칭(symmetry)’과 ‘율동e(urythmy)’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전자는 예술의 객관적 아름다움을, 후자는 주관적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가치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초기에 객관적 미를 추구했지만 점차 보는 사람의 눈이 좀 더 즐거운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대칭에서 조금씩 벗어난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다. 기원전 30년경 『건축 10서』를 펴낸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제자들에게 건축의 엄격한 비례를 주문하면서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가감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는 저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눈은 보기 좋은 것을 찾기 마련이다. 정확한 비례를 적용함과 동시에 필요하다면 약간의 변형을 더해서 눈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매력도 없는 그림이 되고 만다.”

010_article_topic

Please subscribe for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