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21

아레카야자야, 나도 너를 만난 것이 무척 기뻤어

글.최재천

SF 전문출판사 아작 편집장. “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_ 조 월튼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지음
아작

첫 책을 낸 지 5년 반 만에 100종의 책을 낸 아작은 SF 전문 출판사다. 그런데 100이라는 숫자에도 셈하지 않은 책을 2년 전에 한 권 만들었는데, TV 프로그램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공식 가이드북이 그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고양이 관련 책을 사서 봐도,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더니, 역시나 강아지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다. 당시 반려견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여러 반려동물뿐 아니라 반려 식물에 관해서까지 이것저것 공부를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책을 만들기 위한 직업적 관심사였지 마음이 동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나는 완전히 변했다. 삽목과 분갈이를 한답시고 화분과 흙을 사서 손에 흙을 묻히고, 출근하면 가장 먼저 분무기로 아레카야자에 물을 뿌려주며, 이것저것 원예용품을 구비하다보니 원예용 가방이 가득 찰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단은 다 코로나19 때문이다. 감염병 유행 이후 몇 안 되는 동료들이 종종 재택근무를 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 날이 많아 졌다. 그러다 보니 나와 함께 사무실을 채우고 있는 식물에 눈이 갔다. 전에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는데, 텅 빈 사무실에 가만 있던 식물들과 어느날 눈이 맞은 것이다. 아니, 저 녀석은 왜 저렇게 볼품없게 웃자랐지? 이 녀석은 왜 다 죽어가는 거야? 그건 그렇고, 도대체 저 녀석 이름은 뭐지? 이렇게 나도 식물을 반려하게 되었다.
SF에서 ‘반려로봇’은 흔한 소재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본 신문기사 제목들을 보면 이제 반려로봇은 오히려 현실에서 더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 같다. ‘로봇이 집으로 들어왔다. 반려로봇시대 성큼!’ ‘반려로봇, 이용자 심리상태도 분석’ ‘KT 올 상반기 AI 반려로봇 서비스 상용화 잰걸음’…. 쏟아지는 기사들 사이에
서 하이퍼리얼리즘 SF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가 심너울의 단편「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와 한국 사회파 SF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작가 이서영의 단편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한」이 생각났다. 두 작품은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직 쳐다보지 않는, 친구 로봇들에 관한 소설이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에 수록된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는 남도의 외딴 섬에 있는 한 시골 학교에서 단 한 명뿐인 학생을 위해 공부봇 ‘튜비’를 설치하면서 벌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유미의 연인』 수록작인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한」에는 ‘반려봇’에 보다 걸맞은, 이
름마저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로봇 ‘라포’가 등장한다. 외딴 별에 지구와 같은 환경을 조성한 뒤 이주하려는 테라포밍 프로젝트를 위해 죄수 노동자들이 그 별에 버려진다. 반려봇 라포는 이들의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그런데 라포가 사고로 실종되자 노동자들은 라포를 찾으려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 노력이 이주 환경을 바꾸기 위한 투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꽤나 전투적인 소설이다.
두 소설에 나오는 반려로봇은 여느 영화 속 로봇들처럼 탁월하게 지능이나 전투력이 높은 전투병기는 아니다. 영화 〈승리호〉에 나오는 ‘업동이’처럼 노름 판돈을 싹쓸이하거나 죽창으로 우주선을 무찌르는 일에는 절대 활용될 수 없다. 이 반려로봇들은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에 정말 ‘로봇처럼’ 기계적인 대답을 반복하거나, 고작 적절히 맞장구를 쳐줄 뿐이다. 가만있자, ‘고작’이라니. 이건 절대로 ‘고작’이 아니다.
반려자든 반려동물이든 반려식물이든, 반려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굳이 그들이 내 심리상태를 분석하거나, 내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준다거나 따위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레카야자에게 내가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잘 자라는 것만 보아도 좋고, 새로 푸른 잎이 칼처럼 나주면 그것으로 족한 친구도 있는 법이다. 외딴 별 노동자들이 라포에게 보낸 인사를 빌어, 나도 내 반려식물에게 전하는 인사로 글을 맺는다. “아레카야자야, 나도 너를 만난 것이 무척 기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