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20

시작부터 만렙이 좋아

Editor. 김지영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슬리퍼에 트레이닝복 차림을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노라면 가끔 한숨이 나온다. 예전에는 자유롭기 짝이 없었는데, 왜 요즘은 다른지 모르겠다. 기분 탓이겠지?

『원펀맨』
ONE 지음 / 무라타 유스케 그림
대원씨아이

만화나 라이트 노벨 읽는 걸 왜 독서로 생각하지 않을까? 독서에도 취향이란 게 있다.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듯 책을 골고루 읽어야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엄연히 책 시장에도 취향이라는 게 있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더 오래,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이 코너를 마련한 데도 좋아하는 책의 취향을 숨기지 말고 우리 모두 ‘북밍아웃’을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덕분에 ‘덕력’만 높아졌다. 이제는 일본만화 관련 상점에 가면 모르는 캐릭터 이름이 없을 정도니.) 몇 개월 사이 장르물이 독자의 ‘최애’가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싫어할 자 어디 있을쏘냐. 슬슬 재미있는 이야기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만화와 라이트 노벨이 수면 위로 떠 오를 기회다!
최근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모험물이나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히어로물을 주로 읽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시작부터 ‘만렙’ 찍은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으면 손이 잘 안 간다. 대체로 모험을 떠나거나 히어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병약한 주인공이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강해져야 한다는 의지가 생겨 피나는 노력 끝에 강해지는 성장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는데, 소년물이든 스포츠물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서사만 가르치는 양성학원이라도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뻔한 서사에 좀 질렸다. 캐릭터 성장물을 보면 답답해서 울화가 치민다. 약함을 탓하는 게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시련과 성장 과정이 답답하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맛이 없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건에 대하여』 『원펀맨』은 완벽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을 겸비해 그 누구도 쓰러트리지 못한 몬스터나 악당을 물리친달까. 겉모습은 한없이 약해 빠진 슬라임과 힘없어 보이는 대머리이기에 다른 캐릭터들이 무시하거나 얕보지만, 이들은 이미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응원하거나 극단적 위기의 상황에만 등장해 힘을 보탠다. 두 작품이 큰 사랑을 받는 건 주인공이 강하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강한 인물을 중심으로 기존과 다른 서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는 인간이었다가 전생했더니 슬라임이 된 ‘리무르’가 마물의 나라를 건설하고 주변 국가와 동맹을 맺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쉽을 보여주며 나름의 방식으로 이세계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보통 리무르처럼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면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용사가 되는 플롯인데, 어째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마물인 슬라임을 주인공으로 삼아 다른 마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설정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내는 과정은 볼거리가 쏠쏠하다. 반면 『원펀맨』은 ‘S급 히어로’들도 버거운 괴인을 주먹 한 방으로 해결하는 사이타마가 히어로 협회에 들어가‘C급’이라는 바닥 등급부터 시작해 괴인을 쓰러트리면서 서서히 등급을 높여가는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치적 움직임이나 조직 구성원 간 서열과 파벌 다툼을 발견할 수 있고, 이유 없이 ‘괴인’을 멸시하는 인간의 바닥도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성장물은 지겹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일하랴, 운동하랴, 취미생활 하랴 바빠 죽겠는데 주인공 성장하는 것까지 기다려주기 숨 막힌다. 그냥 처음부터 미친 듯이 센 주인공이 나와서 다 때려 부수는 사이다가 대세다. 예의 없는 직장상사에게, 제 잘난 맛에 사는 친구에게, 대중교통 치한에게, 눈꼴신 커플(?)에게 ‘원 펀치’ 못 날리는 현실 대신 가상에서라도 시원하게 날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시작부터 ‘만렙’인 주인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