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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0

시간이 목구멍에 걸렸습니다

Editor.홍신익

『이 순간 이 시간 이 삶』
박이문 지음
미다스북스

“마음의 평화 : 함박꽃처럼 벙긋 피는 젖먹이 어린이의 얼굴에서 무한한 축복을 발견한다면 여드름이 덕지덕지한 사춘기 소년의 얼굴에선 그 속에 숨어 있는 야생적 생명력을 느낀다. 꽃처럼 맑고 고운 20대 초반의 발랄한 여대생의 얼굴이 되돌아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중년 생활인의 얼굴은 차츰 가라앉는 삶의 안정감을 보여준다. 찌그러지고 뭉그러진 노년의 얼굴에서 삶의 성숙성과 지혜를 읽을 수 있다면 죽음에 임박한 고희의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서 모든 것과의 화해를 희구하는 마음의 평화를 엿볼 수 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열정적으로 일을 해내고 멋지게 떠나는 여행자, 독립해서 나만의 안식처를 만들고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쓰는, 그런 자유의지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열어젖히는 커리어 우먼? 그것도 좋지. 언제부터였을까. 자주 체했다. 뭘 하고 싶었는지 이랬다저랬다 제출과 철회를 반복했다. 용기가 절로 솟아나지도 않았고 단단한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은 삽시간에 썩은 동아줄로 변했다. 한 해한 해 속사포로 흩어지는 시간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싶었다. 새해벽두가 전혀 기쁘지 않았고 조급함이 앞섰다. 학생증에서 주민등록증으로 대체되는 삶에는 정규랄 게 없었다. 티끌 정도의 선택이 나를 집어삼켰고, 매번 전날만 원대했던 다짐은 새벽녘 꿈과 함께 뒤섞여버렸다. 시간을 삼키는 동안 부모님은 나이 들었고, 동생은 나보다 더 커졌다. 그리고 몇몇은 내 곁을 떠나갔다. 들풀로 뛰어드는 삶이 아닌, 유리 돔 안에 갇힌 꽃 한 송이를 목이 빠져라 들여다보는 야수적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로 격언이나 경구, 잠언을 뜻하는 말이다. 『이 순간 이 시간 이 삶』은 저자의 아포리즘을 담은 두 개의 세트 중 1권이다. 박이문 선생이 수십 년을 고찰해온 인문학적, 철학적 지혜가 담겨 있는데, 사유의 시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박이문 선생은 프롤로그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에서 물음표 없는 물음을 던졌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이며 내가 돌이키고 싶은 순간은 언제였을까. 만약 외계인 하나가 그런 기회를 준다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숱한 기억 중 나는 과연 무엇을 을수 있을까. 생애 첫 심부름에 나선 여섯 살의 무구했던 어느날, 학교 복도를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던 학창 시절,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들으며 레일바이크로 내달렸던 김유정역의 오후, 야간 알바 후 맡았던 이른 목동 거리의 새벽 냄새까지 모든게 꿈처럼 지나갔다. 사이사이 나를 메운 선택의 발현들은 몸을 곱게 웅크리고 부풀다 꺼졌다 했다. 하지 않아 후회했고 저지른 뒤 아쉬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나침이 독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때 되레 바보 같은 한 마디가 튀어나왔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때 정작 원했던 글자를 적지 못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과했을 때 사랑은 지나쳐갔고 누군가가 정말 밉고 싫을 때 오히려 내가 더 불행했다.
누구나 한 살로 시작해 매해 처음을 맞이한다. 먼저 살다간 이들의 깨달음이 말과 글로 수두룩하게 전해지는데도 여태껏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아무도 ‘나’로 살아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과 청춘, 중년과 노년 그 어떤 것도 대타가 없다. 내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언제였든 다시 선택할 기회 또한 없다. 불혹, 일흔의 나를 아직 예상할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한 분명히 닿을 순간이다. ‘천 리를 배웅해도 결국은 헤어져야 한다’라는 말처럼 언젠가 우리는 보내야 하고 떠나야 하며 닿아야 한다. 말도 없이 지나쳐가는 오늘을 살면서 원치 않는게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고 겪어내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박이문 선생은 96개의 아포리즘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람과 자연, 시간과 인연을 이야기했다. 영원한 현재인 지금을 살며 아름다운 걸 택하라고, 자기만의 꽃을 피우며 살아가라 했다. 어렵지 않은 단어와 문장 나열 안에 읽는 이의 잣대로 마음껏 헤집을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읽어내릴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제목에서, 첫 문장에서, 이어지는 언어 아래서 멈춰야 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삶, 그 안에서 지금의 나를 건져내야 했다.
이제는 달콤한 지위나 물건을 가지고 하늘을 나는 것이 어른의 삶이 아님을 안다. 흔들거리고 서성서리며 이 땅 위에 선나는 어른아이로 살고 있다. 지나온 날들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아도 내 발로 밟은 걸음이니 괜찮다. 다만 목구멍에 걸린 시간은 아직 소화되지 않았다. 몇 번의 매일을 보내야 할진 모르겠으나 동시에 알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오지 않은 먼 순간에 목매지 않을 때 비로소 시간을 제대로 삼킬 수 있을 거란 걸.
“지나간 경험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내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은 곳은 바로 지금 영원한 현재, 이 순간, 이 시간, 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