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색(Color)

에디터: 유대란, 박소정

독일의 한 조형대학 교수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에게 ‘작업 숙달 정도로 판단하는 집중력 실험’이라고 설명하고, 엄지와 검지로 성냥갑을 잡고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넘겨받을 때마다 대상자가 큰 소리로 횟수를 세게 했다. 대상자가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숫자를 세는 것을 단순하게 느끼는 것 같으면 중간중간 그의 신경이 거슬리도록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상자는 정확히 숫자를 세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불만이 터져 나올 때쯤에 성냥갑을 대상자에게 쥐여주고 직접 움직이도록 했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이렇게 물어봤다. “잘하셨어요. 하지만 집중을 못 하신 것 같군요. 당신에게 질문 몇 가지 하겠습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니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단지 당신이 얼마나 빠르게 대답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상자는 혹여 자신의 집중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다시 긴장했다. 그에게 성냥갑을 다시 한 번 돌리게 한 후 6~7회 정도에 도달했을 때 대상자에게 물었다. “지금 생각나는 연장은 무엇인가요?” 이 기습적 질문에 대상자의 90%가 “망치”라고 대답했다. 성냥갑을 계속해서 돌리게 하고 20회 정도 셀 때쯤 다시 묻는다. “지금 생각나는 색깔은?” 이 질문에 응답자 중 약 80%가 “빨강”이라고 답했다.
이 실험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살펴보자. 피실험자가 성냥갑을 돌리며 자신의 집중력을 증명하기 위해 행위에 몰입할수록 자기의식을 제어하는 힘은 줄어든다. 대신 잠재의식이 서서히 수면에 떠오른다. 그때 던지는 기습적인 질문에 그가 내놓는 대답은 무의식을 반영한다. 성냥이 연상시키는 불은 인류사 발전과 밀접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망치, 그리고 빨강을 생각한다. 80~90%가 같은 대답을 했다는 사실은 전형성을 나타낸다. 이런 전형성은 우리에게 색에 관한 원초적으로 각인된 인상이나 관념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의 관념 속에 뿌리내렸을까?

색의 역사
색이란 물체가 빛을 받을 때 빛의 파장에 따라 표면에 나타나는 특유의 빛을 뜻한다. 따라서 색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빛과 빛이 투사되는 물체 그리고 빛을 감지하는 눈과 뇌와 같은 기관이 필요하다. 색에 대한 연구는 수천 년 전부터 진행되어왔지만, 이렇게 명료하게 정의된 것은 200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색(color)은 라틴어에서 ‘감추다’를 의미하는 동사 ‘셀라레celare’에서 파생되었다. 오래전 낯선 환경과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숨겨 보호하기 위한 때부터 색의 중요성이 인식되어온 것이다. 이후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색은 소리, 풍경, 예술,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 두루 쓰이고 있다.
최초로 인류가 색채를 사용한 흔적은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빙하 시대의 유물로 붉은색으로 채색된 인간의 뼈가 발견됐다. 이후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사슴이나 소 같은 동물들이 황토색, 흑백색으로 추상적으로 채색된 것이 발견됐다. 고대 시대의 이집트 문화에서는 피라미드와 화려한 미라의 관 등이 발견되면서 기존에서 크게 발전해 색채를 다양하게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색에 관해 활발히 연구했는데,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개는 곧 사라지므로 물체의 본성이 아닌 거짓 색이며, 사과의 색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되니 참된 색, 즉 물체의 본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세의 학자들은 열과 냉각 관계에 의해 색채가 성립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당시 연금술을 이용해 그림물감을 개발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며 원근법과 명암법에 대한 이론이 설립됨과 동시에 회화와 함께 유채안료도 발전했다. 다방면에 큰 업적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론』에서 최초로 색채 조화의 연구를 통해 배색이론과 보색조화설 등을 남기며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색을 보는 과정이나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 물리학자는 물론 심리학자, 생리학자 등 많은 분야에서 관심을 보이며 색채학이 발전되기 시작했다. 당시 뉴턴은 프리즘으로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기존의 광학이론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광학』에서 백색광에 다양한 색이 혼합되어 있다고 말하며, 빛은 광원에서 전파된 진동파가 눈을 자극해 색의 감각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에 괴테는 뉴턴의 광학이론을 반박하며 빛은 자연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모든 색이 만들어진다”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며 『색채론』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빨강이 정열과 연관되고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반면 파랑이 수축과 차분함과 연관된다는 색의 심리적 효과가 최초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후 1856년에 이르러서는 화학자 퍼킨W. H. Perkin이 최초의 화학 합성염료 모브mauve를 만들어내며, 어떤 색이든지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비교적 최근인 1964년에는 존스홉킨스 대학과 하버드 대학 연구진들에 의해 인간의 눈에 빨강, 초록, 파랑의 3색을 인지하는 감광세포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하며, 색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쓰임새가 많아짐에 따라 더욱 활발히 진행 중이다.

색의 표현
인동(忍冬) 잎 /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사람은 10만 가지 이상의 색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측색기와 같은 광학적 분류로는 수백만 가지 이상의 색을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보다 정확한 색을 얻고자 하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색들은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각 이름을 갖고 있다. “빨강, 파랑, 검정, 하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묻는다면, 우리는 즉시 이러한 색을 가진 어떤 사물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색을 나타내고 있는 그 단어들의 깊은 의미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색채론1』을 통해 전한 이 말은 색이름이 단순히 색을 넘어서 그 이상을 전달한다는 특성을 잘 나타낸다. 예를 들어 김춘수의 시 ‘인동잎’에서 군데군데 표현된 색 표현은 단순한 색을 넘어 화자가 의도한 분위기와 감성을 전달한다.
색이름은 크게 기본색과 관용색으로 나누어진다. 기본색의 경우 색채를 서술하거나 산업 기준의 체계에 따라 분류해야 하는 등의 작업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를 말한다. 관용색은 고유색을 포함하며 현대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색을 말하는데, 동물, 식물, 지명 등에 사용된다. 관용색에는 기억색과 고유색, 현상색이 있는데 기억색이란 사과색 같이 실제 색이 아닌 상상 속의 색채를 말하며, 고유색과 달리 물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일 블루와 같은 색을 예로 들 수 있다. 현상색은 대기의 색, 물의 색, 하늘의 색 같이 실제 물체가 아닌 색으로 자연 현상이나 날씨의 변화 등에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색의 표현은 회화 작품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평생을 풍경화 그리기에 몰두한 화가 윌리엄 터너는 최초로 빛과 색을 작품의 소재로 쓰며 몽환적인 작품을 전 세계에 알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림자와 어둠’과 ‘빛과 색채(괴테의 이론)’가 있다. 터너는 작품 후기로 갈수록 대상의 속성이 서서히 빛과 어둠에 사라지는 낭만적인 모습을 상세하게 표현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오늘날 추상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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