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사진으로 이야기하라

에디터. 지은경 사진. ⓒ 김용호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멋스러운 사람들과 물건들, 그리고 이벤트가 모두 패션 잡지 안에 들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한 것들, 고급스럽고 독특한 것들을 찬양하던 이 시기는 패션의 어마어마한 전성기이기도 했다. 김용호는 그 시기, 패션계의 가장 중심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패션 사진가다. 화려하게 역동하던 대한민국 패션계의 산증인, 철학을 가진 사진작가, 그리고 서사를 담는 이야기꾼. 최근 발행된 그의 책『Photo Language』는 한 작가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모아 놓은 단순한 회고록만은 아니다.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한 작가 노트이자 한국 패션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김용호는 대한민국 패션 매거진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수많은 모델과 디자이너, 예술가, 배우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서길 열망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 〈여배우들〉에서 그는 당시 가장 잘나가는 사진작가, 즉 그 자신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카메라 속에서는 그만의 또 다른 세상이 재창조된다. 이미지 안의 내레이션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물건이나 현상, 인물이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보그』 『엘르』 『바자』 『GQ』등 비주얼 미학을 생명으로 삼는 매거진에서 김용호의 활약은 언제나 돋보였다. 또한 그는 기업 광고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갤러리에서 광고 사진을 전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우아한 선과 색으로 한 폭의 동양화, 애잔한 이야기를 담은 무성영화처럼 이미지를 담아내는 그의 프레임이 일상으로 향하자 평범한 풍경에서 기하학적 패턴이 도출되었고, 새로운 디자인 영감을 선사했다. 이쯤 되면 그의 작업을 상업 사진이냐 순수 미술이냐로 구분하려는 규정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그의 모든 작품은 하나의 공통된 키워드를 가졌다. 바로 ‘스토리 텔링’이라는, 그만의 창의성과 감성이 담긴 호소력이다.
"수십 년 동안 해온 작업물을 정리하며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사진가’라고 답하지만, ‘어떤 사진을 찍는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작품 사진으로 ‘피안’이나 ‘몸’ 그리고 화제가 됐던 다수의 광고 사진 시리즈가 있지만, 나를 설명할 명징한 수식어가 없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광고 디자이너와 아트 디렉터의 역할을 해왔고, 조형물을 제작하거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워낙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하다 보니 무엇이 나인지 나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성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다양성’에 대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사체에 내재된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작품 속에 시선을 들여놓으면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연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한 예로, 2003년 진행한 『보그』촬영은 대공황기 일본 동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아이들을 팔기도 했다는 당시, 마을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면 아이가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 모두 아이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동요인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김용호는 이 노래에 얽힌 불행한 이야기를 촬영 소재로 채택했다. 화보는 한 소녀가 실종된 친구를 찾아 유원지에 가는 콘셉트로 이뤄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원지에서 놀다가 어두워지면 주변은 온통 정적과 어둠이 감싼다. 소녀는 유원지에서 친구를 찾는 동시에 잃어버린 자신의 소녀 시절을 인식한다.
2013년 ‘제비다방’ 프로젝트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 모더니즘 시대의 혼란기를 표현한다. 작가 이상의 자전적 소설 『날개』의 플롯을 사진으로 재구성한 그 서사를 따라가면, 소설 한 권을 읽은 느낌이 들 정도로 중요한 장면들이 재현되는데, 그 안에서 한국 근대와 현대의 스타일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소설 속 가장 중요한 장면인 신세계 백화점(구 미쓰코시 백화점)이 실제 배경으로 사용되어 사진에 생생함을 더한다. 보드라운 깃털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소설에서처럼 백화점 옥상 아래 펼쳐진 시내 풍경을 바라보고있다. 소설에서는 혼미한 정신과 허탈한 감정을 안고 내려다보던 서울 풍경으로 시선이 향한다면, 사진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춘다.
2008년,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단어 ‘불국루비통(佛國漏悲痛)’에서는 사회비판적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루이 비통 가방이 너무나 많이 팔려 ‘3초 백’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루이 비통은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한 번에 한 개 이상의 물건을 판매하지 않았고, 구매 이력이 있는 사람은 6개월 이내에 다른 루이 비통의 제품을 구매할 수 없는 규제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루이 비통을 향한 열망은 더욱 견고해졌다. 번호표를 뽑고 명품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촌극은 오늘날에도 종종 벌어진다. 김용호는 이렇게 손님이 애원하는 듯한 상황이나, 명품을 착용하면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했다.『노블레스』 촬영에서 그는 ‘청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한자를 조합해 ‘불국루비통’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남자를 떠나보낸 후 비통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청담이가 우는 모습은 소비자가 생산자로 인해 울고 있는 비정상적인 힘의 역학관계를 풍자한 것이다. 이 사진이 루이 비통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촬영되었다는 지점에서 다시 한번 작가 김용호의 입지, 그리고 기발함을 느낄 수 있다.
2022년 새해 첫날, 그는 새로운 개인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방황하는 호랑이를 따라다니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2022년의 상징인 검은 호랑이는 액운을 막아주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영묘한 동물로 여겨지지만 세상은 아직 팬데믹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울하다. 2022년에 검은 수트를 입고 찾아온 이 호랑이는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며 외롭고 우울한 상황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경복궁으로 들어간 호랑이는 궁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손에는 우주인 인형과 꽃을 들었다. 한복을 입은 소녀들과 인사하기 위해 다가가 말을 건다. 그러나 소녀들은 호랑이를 보고 도망간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서로를 경계하게 된 현실이 겹쳐진다. 그러나 호랑이가 걱정된 소녀들은 곧 다시 호랑이에게 다가가 친구가 된다. 2022년 연하장을 위해 기획한 이 작업은 고립된 시대 안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 홀로된 이의 외로움, 친구를 향한 그리움이 혼재되어 있다. 힘든 시기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존재들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사진 속 호랑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자 소외된 이웃이다. 이 모두를 그는 호랑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투영했다.
『Photo Language』에서는 김용호의 작품들을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만날 수 있다. 그 안에는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름다운 인물들, 여전히 사랑받는 배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반가움도 있고, 작은 작업 하나에서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풀어내는 작가의 기발함, 그리고 한국 패션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방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서사까지 총망라되어있다. 오랜 시간 김용호는 사진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나온 에피소드들을 새롭게 각색해 창조 활동을 펼쳐왔다. 한 작가의 사진이라고 쉽게 믿기지 않는 스펙트럼 안에서 그는 분야의 경계를 지워 오기도 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 그의 사진 속피사체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하나같이 우아함을 잃지 않고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어쩌면 이것이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패션계에서 김용호를 독보적인 창작자로 살아있게 하는 비결이 아닐까.
October22_Inside-Chaeg_02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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