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21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로지 프로젝트』
그레임 심시언 지음
송경아 옮김
까멜레옹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동시에 있을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전자를 선택하면 삶을 보다 효율적으로 꾸려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신 만족을 지연시키는 삶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나는‘개미와 베짱이’나 ‘마시멜로 이야기’를 통해 익히 배워온 당위를 좇는 삶의 태도를 따르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선택하는 삶을 늘 동경했다. 어차피 겨울이면 죽을 운명인 베짱이가 여름에 노래 부르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이와 비슷한 물음을 관계라는 영역에 적용해 보자. 만나면 ‘좋을’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삶의 반려자로서 누구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반려자를 선택하는 문제 역시 난제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 사실은, 끌려가는 마음을 어떤 수로도 붙잡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물음 자체가 속절없이 끌리는 마음을 부여잡기 위한 이성적 노력일 수도 있다. 그레임 심시언의 『로지 프로젝트』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헤쳐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인 돈 틸먼(이하 ‘돈’)은 정해진 틀에 맞추어 일상을 패턴화하고, 감상적인 감정의 소비를 지양하는 ‘아스파이’다. 책에 따르면 아스파이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으로 감정을 읽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고, 조직화, 집중, 혁신적인 사고, 이성적인 객관성을 극단적 특징으로 지닌다.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지향하는 그는 어느 날 효율 측면에서 완벽한, 적어도 현실적으로 관리가 가능할 정도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최고의 관행을 따라서 각종 객관적 표준 척도를 따른 목적 지향적인 과학 수단”으로서의 설문지를 제작한다. 이른바 완벽한 반려자를 찾기 위한 ‘아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소나기처럼 내려와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것이라 하지 않나. ‘사람’을 찾는 프로젝트는 ‘사랑’을 찾는 일로 변해간다.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가 그려지는 예상 가능한 스토리다.
하지만 이 뻔한 소설은 묘하게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의 아내 찾기 프로젝트는 로지(주인공의 상대 여성)의 친부 찾기 프로젝트로, 그리고 마침내 돈의 ‘로지 프로젝트’로 확장된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돈은 절대적인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사고와 의식의 딱딱한 가장자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자신의 틀을 깨어내기도 한다. 닫혀 있다고 생각하던 문화에 관계 맺음을 통해 편입되기도 하는 돈에게서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성애적 사랑의 설렘은 빛바랜지 오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변곡점들에서 경험했던 환희는 여전히 생생하다. 어디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이랴, 누군가로 인해 자기 삶의 확대를 경험했다면 그 관계 역시 순수한 사랑이리라.
주마등처럼 스친 나의 경험들은 크고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거 꼭 지금 해야 해?” 하며 손을 잡아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상기시켜 주었던 동료, 나의 뜻을 헤아려 소통하려 애쓰고, 내 진심에 노력으로 보상해 주었던 어린 친구들이 내 눈을 다시 뜨게 해주었다. 돌아보면 별 일 아닌 그 순간순간들이 내 삶의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돈의 변곡점도 마찬가지였다. 로지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일생 처음으로 규칙을 어기고 레스토랑 예약 시스템을 해킹한 시점. 돈은 그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때부터 그는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만나면 좋을 사람’이 아닌 ‘만나고 싶은 사람’을 향해가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예기치 않게 이끌리고 스며들어 삶을 새로운 풍경으로 채색하는 사랑은 경이롭고 눈부시다. 사랑은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래의 나를 깨고 상대와 맞춰가고 싶은 본능을 발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종산 작가가 말했듯이 사랑은 ‘원래’라는 말을 지우는 거니까.(이종산, 「사랑보다 대단한너」) ‘원래’라는 틀에서 벗어나며 돈의 내면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이 소설의 묘미다. 어쩌면 사랑의 중심에는 세계를 향해 한 걸음,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성장이 있기에, 사랑은 언제나 뻔하지 않은 울림을 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