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20

브람스를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 윤성근

서울시 은평구에서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꾸리고 있다.
『서점의 말들』 『내가 사랑한 첫 문장』 등과 책과 서점에 관한 책을 몇 권 썼다.

『생각하기 / 분류하기』
조르주 페렉 지음
이충훈 옮김
문학동네

헌책방에는 오늘도 잔잔하게 브람스가 흐른다. 누군가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브람스를 좋아하요?”라고 물은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지만, 나는 브람스를 듣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헌책방에서 브람스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책방 일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프리재즈 음악을 듣거나 손님에게 추천받은 앨범을 주로 틀어놨다.
하지만 그렇게 음악을 듣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음악의 한계가 아니라 나 자신이 지친 것이다. 가게에 음악을 틀어놨을 때 그걸 가장 많이, 오래 듣게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가게 주인인 나다. 손님들이야 길면 한두 시간 머물다 나가지만 나는 8시간 동안 가게를 지키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다 들어야 한다. 내 취향이 아닌 음악을 온종일 듣는다는 건, 과장 조금 보태자면 거의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책방에서 듣는 음악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틀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나는 클래식을 좋아해서 LP를 많이 갖고 있었다. 헌책방에서 턴테이블로 LP를 재생해 놓으면 보기에도 썩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고 보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LP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걸 날마다 어떤 순서를 정해 틀어 놓을지 계획을 세우는 게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냥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틀어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주제를 분류하고 계획에 맞게 일이 진행되어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다.
곧장 LP 수백 장을 두고 분류작업에 들어갔다. 중학생 때부터 모은 앨범들이라 세어보니 양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선물받은 것도 더러 있어서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음악도 있었다. 게다가 살면서 취향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이를테면 같은 클래식이라고 해도 대학 다닐 때는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좋아했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슈만, 브람스, 멘델스존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사정을 모두 반영해서 헌책방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려니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다행히도 나와 비슷한 목록 만들기 집착증을 가진 소설가가 있어서 리스트업 작업에 지칠 때면 그의 책을 읽으며 위안과 아이디어를 얻었다.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실험적인 소설을 추구하던 프랑스의 창작집단 ‘울리포OuLiPo’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짧은 작가 활동 기간 동안 갖가지 기발한 방법을 사용해작품을 생산해냈다.
그가 쓴 책 중 『생각하기 / 분류하기』라는 게 있는데, 제목처럼 내용도 좀 이상한 작품이다. 내가 아이디어를 얻은 부분은 그 안에 있는 짧은 글 「책을 정리하는 기술과 방법에 대한 간략 노트」다. 첫 부분부터 매력적이다. 책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 괴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모으는 괴벽’이고 다음은 ‘모은 것을 분류하는 괴벽’이라는 거다. 마치 장서를 이기지 못해 결국 헌책방을 차린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런데 이 글에서 페렉은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법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예로 들며 정리될 수 없는 것에 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맨 마지막에는 무질서한 책장이 때로는 고양이 쉼터나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조언이 등장한다. 한편으론 허탈하면서도 일리가 있는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저 LP들을 어떤식으로든 정리할 수 있겠지만 정리가 끝나면 그 즉시 흥미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저것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로 귀찮아서 그대로 두는 게 아니다. 정말로!
그래도 어느 정도 분류를 마쳤기 때문에 지금 헌책방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앨범을 주로 듣고 있다. 플레이리스트 중에는 물론 브람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브람스만으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지휘자별로, 연주자별로, 레이블에 따라 정리하고 발매 연도나 레코딩 방법에 따라서 또 가지가 여러 개로 나뉜다. 아아,페렉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냥 LP 더미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도록 놔두는 게 최고의 방법이려나? 아무튼, 도저히 분류할 수 없는 브람스 음반 중 하나가 지금도 턴테이블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