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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0

맞다, 네가 옳다

Editor.강지이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해냄

‘나이 듦’. 40대 중반의 내가 나이 듦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저 그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고 앞으로도 나이 먹을 일만 남은 입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흔쾌히 말할 용기가 없었다. 이시점에 펼쳐 든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는 속절없이 나이가 들어버린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과감히 말한다. ‘옳다, 당신이 옳다’ ‘맞다, 네가 맞다’라고. 그래서 나도 용감하게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일했던 자원봉사자들이 유가족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초기에는 많은 심리 치유 전문가가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그 대신 집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고, 봉사자들은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슬픔과 분노로 유가족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묵묵히 유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했던 그들이 오히려 전문 자격증을 갖춘 이들보다 현장에서 더 큰 힘과 효력을 발휘하는 걸 저자는 여러 번 목격했다. 그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저자는 이처럼 일반인이 전문가보다 더 효과적인 치유를 이루어내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정신과 의사가 직업인으로서 환자를 대할 때에는 이 환자는 ‘마음의 병’이 있고 그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리고 약 처방을 통한 뇌의 기능이나 신경, 호르몬의 변화를 꾀해 치료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일반인은 그런 생각이 없다. 마음을 크게 다친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아줄 뿐이다. 유가족에게 다가간 봉사자들은 그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당신이 옳다고, 그러니 더 이상 아파하지 말라고.
신기하게도 이 말은 그 어떤 처방전보다 놀라운 치유의 효과를 발휘했다. 저자는 이 놀라운 말의 힘을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라고 표현한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놓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마음과 ‘당신이 옳다’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 뛴 채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이나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허공의 메아리와 마찬가지다. 저자는 아무런 긍정 없는 충고는 산소 공급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 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고 얘기한다.
‘당신이 옳다’라는 이 짧은 말이 우리 사회에서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현대 사회가 사람을 그림자처럼 취급하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존재 자체가 주목 받지 못해 생긴 허기와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관종’이라는 말처럼 눈에 띄는 행동을 부추기며 독특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사회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최근 유행한 TV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서 진의 영광을 차지한 가수 임영웅은 발라드만 부를 때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트로트를 부르자 비로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튀지 않으면 묻히는 세상이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은 거대한 물결과 같은 대중 속에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는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 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 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저자는 현재의 의료 현실에서 우울증 진단이 너무 쉽게 내려진다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매우 흔한 노이로제 중 하나인 우울증을 진단하는 기준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다. 정신 질환에 대한 미국 표준 진단체계인 DSN-5에 따르면 ‘하루의 대부분 우울한 기분이 있는 기간이 2년 이상 지속’되면서 불면이나 과다수면, 식욕 부진이나 과식, 활력 저하나 피로감, 자존감 저하, 집중력 감소나 의사 결정 곤란, 절망감 중 두 가지 이상의 항목에 해당하면 우울증이다. 우울증을 확진하는 뇌 생리학적, 생물학적, 영상학적 검사법이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울증 진단을 쉽게 내리는 사례에 한몫을 더한다. 이런 애매모호한 진단법으로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우울증 처방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들 흔히 궂은 날씨나 안 좋은 일들로 인한 순간적인 우울감을 쉽게 ‘난 우울증이야’라고 자가 진단하는 늪에 빠진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우울증을 흔하게 언급하는 사회에 대해 경고한다. 저자의 친구가 어느 날 구순이 넘은 노모가 자꾸 죽음에 관한 얘기를 하신다면서 우울증 약을 드시는게 좋을지를 문의했다. 정혜신 박사는 구순이 넘은 엄마가 그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치료에만 집중하신다면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면서, 차라리 ‘엄마, 죽는 게 무서워?’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엄마와 딸이 손을 꼭 잡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아쉬움이나 회한을 모두 나누는 과정이 곧 치유와 평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낯선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항우울제를 먹으며 혼몽한 상태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은 외려 슬프기만 할 것이다. 저자는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삶의 파도에 리듬을 맞춰서 함께 올라타라고 조언한다. 이런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가 거의 지워져 자기 소멸에 이른 사람을 만난다면 ‘나’가 또렷하게 돌아올 때까지 상대방의 ‘나’가 위치한 곳을 강하게 압박하는 심리적 CPR을 행하라고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요즘 당신의 마음은 어떠냐고 묻는 것이다. 밝고 화려한 사람일수록 그의 마음은 외면에 가려져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그런 마음을 꺼내어 솔직하게 밝은 빛에 비추어보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와 사랑이다. 우리는 비싼 차와 액세서리, 남들이 추켜올리는 직업 등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나’를 겉으로 드러낸 채 벌거숭이 나를 숨기고 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와 교감하길 원한다.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겉으로는 참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 것 으로 보인다.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웃는 청소년기 아이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평범한 직장인들, 귀여운 아이들과 뒹구는 엄마들, 커피숍에서 ‘된장녀’ 소리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소확행’을 위해 유행하는 음료 잔을 움켜쥔 젊은이들. 그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야기해 보자.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그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자. 그리고는 그저 당신이 옳다고 말해보자. 그 순간 상대의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벌거벗은 진짜 ‘나’가 환한 미소로 손을 내밀 것이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거니?”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저자는 이렇게 한 사람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갠 채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 ‘한 사람’만 있다면 절망의 늪에 빠진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지 않더라도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올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니 한 친구가 떠올랐다. 가족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던 20대 젊은이다. 그때는 나 또한 젊고 미숙하여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에게 ‘요즘 네 마음은 어때?’라고 물었어야 했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어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나이가 들고나니 책 한 권을 읽고도 깨닫는 것이 참 많다. 후회도 많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후회는 바로 상대방에게 공감해 주지 못했던 못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별칭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치유자’라고 한다. 어깨가 무거운 별칭이지만 그것이 정혜신 박사가 하는 가장 큰일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저자는 이 별칭에 대해 얘기하면서 ‘공감은 힘이 세다. 강한 위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공감에 대한 이런 결론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절대 명제만큼이나 강력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나 또한 아직은 나이가 덜 들었다고 생각되는 이 순간부터 공감의 실행력을 가져봐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들었다. 공감은 선천적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라고 했으니, 그 구체적 방법은 두고두고 책에서 찾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