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19

망할 놈의 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Editor. 지은경

버텨보려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찰스 부코스키 지음
민음사

이 책을 결국 사고야 말았다. 제주도 책방무사에 인터뷰하는 에디터를 따라갔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도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었다. 제목이 너무도 와닿는 것이 딱 내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작가나 예술가는 아니지만, 미술대학을 나와 한때는 자유롭고 멋진 예술가의 삶을 꿈꿔봤기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주변에 그런 가난한 작가와 잘 나가는 작가들의 세계 또한 잘 알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안 될 줄 알면서도 책 사업, 그것도 암담하기 짝없는 책에 관한 잡지 사업에 뛰어든 것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행위와 같았다. 어찌 보면 실패 확률을 99.9% 떠안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어떻게 이 사업이 삐걱거리며 유지되었느냐는 질문에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모를 일이다.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는 많은 사람이 알아줄 거라는, 그래서 큰돈은 아니더라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허락될 거라는 착각으로만 버텨온 이 사업을 나는 얼마 전에야 비로소 ‘예술’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가능성 없는 도전 자체가 하나의 큰 퍼포먼스고 예술인 것이다. 그러니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라는 책 제목이 너무도 뼈에 사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제목은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 Hell is a Closed door”이다. 한국 제목과 뜻은 다르지만, 느낌은 전혀 멀지 않다.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비참한 삶을 부코스키는 ‘지옥의 닫힌 문’으로 바라본 것이다. 책 107페이지에는 “지옥은 닫힌 문이다”라는 제목의 시도 있는데, 수많은 곳으로부터 거절당해 본 나도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부코스키가 노년에 쓴 마지막 시집 중 하나다. 시를 하나씩 읽어나가면 부코스키가 어떤 경험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이 삶에서 중요했고 또 덜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힘든 과거의 시간을 지나온 그의 거친 숨결이 시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책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못해 어떤 때는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시의 문장에는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작가의 강단이 명료하게 드러나며, 뚝심 있게 균형을 유지한다. 무엇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던 것일까, 그조차도 그는 갖은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을까? 같이 비참함의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시집은 오히려 나를 지독한 절망으로부터 건져주었다.
“그래. 아무도 죽지 않아. 괴로울 뿐이지만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어. 지금까지 유지한 것만도 기막힐 노릇이라고. 균형을 유지해. 그것만이 살길이야. 스스로 풀 수 없는 문제는 잠시 내버려 둬. 에잇, 아무 문제도 없으면 노년에 쏟아 놓을 이야깃거리가 없어 심심할 것 아냐.” 부코스키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미군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부코스키는 아버지의 잦은 구타로 인해 고통을 덜기 위해 13살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가 작가 지망생일 때를 회상하며 쓴 시의 곳곳에서 그는 항상 술에 절어있었다. 미국 전역을 유랑하며 하급 노동자로 살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35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49살이 되어서야 책을 출간하며 전업 작가로 살게 된다. 전당포를 오가며 물건을 팔며 생활했고, 암과 백혈병을 앓으며 죽음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곧 친구가 되어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예술을 위해 굶주렸다. 그가 원한 것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명성과 돈은 중요하지 않았고 글만 쓰고 싶었을 뿐이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절망하지 않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세상에 흔들리거나 휩쓸리지도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삶과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 받는 삶을 살아도 그의 삶은 절대 구차하지 않다. 그 구차하지 않음의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삶은 그저 흘러가거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거늘, 우리는 현실에 너무도 딱 달라붙어 균형감을 잃고 좌절한다. 망할 놈의 인생을 산 것부터가 어찌 보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났으니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죽겠지. 그럼 그만인데 뭘. 이 간단명료한 진리를 나는 자주 잊어버린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혹은 가장 힘을 발휘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것이 나를 구차하지 않게 지켜 줄 지도 모를 일이다. 『뉴요커』의 서평에 써있 듯 “싸구려 소설 주인공 같은 삶 속에서도” 부코스키는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고 솔직하게 글을 썼다. 예술을 하는 데 있어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