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21

독서가의 머릿속 세상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책 좀 빌려줄래?』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윌북

나는 순정만화와 함께 감수성을 키웠다. 물론 순정만화가 초래하는 치명적인 불치병의 잔재가 내게도 남긴 했다. 바로 장밋빛 순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만화 속에서 벌어지는 쓰고 달콤한 감정의 향연이 나를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같은 명작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문학을 넘어 『먼나라 이웃나라』까지 이어졌고, 덕분에 한껏 자극받은 지적 호기심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와 같은 역사물로 이어졌으니, 만화의 영향력은 실로 넓고도 길었다. 20대 때는 짧은 일화로 마음을 울리는 카툰인 ‘광수생각’이 큰 사랑을 받아 나도 읽었는데, 그 이후로 만화를 의미 있게 접한 것은 김영하 작가가 방송에서 소개한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 이야기』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이 읽고 있던 카툰 형식의 책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바로『책 좀 빌려줄래?』이다.
내가 사는 책들은 주로, 책을 좋아하는 지인이 추천하는 책, 도서 팟캐스트를 듣다가 흥미롭게 소개된 책, 아니면 (실패할 확률을 안고) 잘 모르는 분야이지만 제목이 신박한 책, 표지가 세련되고 눈길이 가는 책, 삶이 힘겨울 때 쓸모있을 것 같은 자기계발서나 인간관계서 등이다. 내가 정체돼 있는 듯한 기분이들 때는 각종 분야의 신간과 좋은 책들을 엄선해둔 작은 동네책방에서 처음 본 책들을 사기도 하고, 그곳의 주인장이 추천하는 책이나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는 편이다. 『책 좀 빌려줄래?』는 책을 가까이하는 일상의 소소한 디테일과 이를 대하는 작가만의 사유를 모아둔 책이다. 마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질문을 받은 뒤 정성스럽게 대답을 올리는 SNS에서의 현상을 카툰으로 재현하는 듯한 형식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가령 포스트잇, 영수증, 깃털, 다른 책, ‘그냥 외운다’, 풍선등을 그려 두고 ‘책갈피로 쓸 만한 물건들’이라고 소개한 부분이 그렇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책갈피로 쓸 수 있다는 뜻일 텐데, 그런 사람은 아마도 어디에서나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잠들면 책을 뒤집어 엎어놓은 몸통이 책갈피가 되듯이 말이다. ‘독서가의 변천 단계’나 ‘결정 장애’도 마음의 공감 조명을 순간 번쩍이게 한다. 책을 알고, 푹 빠지게 되어 어느 인간관계보다도 책 읽기에 몰두하다가 책을 잔뜩 사 모으고, 그 책들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까지. 다음 세대에 책을 물려주는 일이야 희망사항이겠지만, 책을 읽을 물리적 시간에 비해 새롭고 좋은 책이 해일처럼 서점가를 덮치는 이 시대에 책을 사서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마음을 지닌 독서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지!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해답을 찾고자 책으로 도피하고 위안을 얻는 이야기는 내 모습을 그대로 옮긴 듯했다.
때로 작가는 책으로 표현되는 문화의 낡은 인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림책에 더 다양한 동물을 등장시켜주세요’가 그렇다. 코끼리, 펭귄, 기린, 고래와 같이 우리에게 흔하고 익숙한 동물에 가려져 소외된 외뿔고래, 화식조, 천산갑 같은 동물도 한 번쯤 주목받을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듯하다. 이처럼 이 책은 책과 끈끈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가진 책에 대한, 책에 의한, 책을 위한 넓은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작가의 사유는 때로는 병렬로, 때로는 직렬로 은유와 환유를 넘나들고 실제와 환상을 넘나들면서 책 덕후의 머릿속을 보여준다. 소박하게 책 덕후를 꿈꾸는 자, 책 덕후임을 자처하는 자라면 책 구석구석에서 마음의 불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을테다. 그리고 그 순간의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듯, 자기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