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21

누구를 위해 이야기는 쓰이나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어맨다 레덕 지음
김소정 옮김
을유문화사

주제와 별로 상관없는 책을 소개하게 되어 유감이다. 원래는 ‘가드닝’이라는 주제에 걸맞은 듯해 보였던 소설책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도저히 추천할 수가 없었다. 편의상이 책을 B라고 하겠다. 많은 독자들이 인터넷 서점에 B를 추천하면서, 읽고 위로를 받았다고 리뷰를 남겨두었다. 이걸 읽고 불편하고 기분 나쁜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 좋은말만 늘어놓는 글을 쓰긴 싫어서 결국 평소 읽어보려던 다른 책을 급하게 들었다. 백인 여성이며 뇌성마비 장애인인 어맨다 레덕이 쓴, 비장애중심주의와 동화 사이의 연관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B를 읽으며 느꼈던 불쾌함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는 동화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이 아닌, 학교와 일상에서 차별받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때의 동화 읽기와 지금의 동화 읽기가 중첩되는 에세이다. 숱한 디즈니의 공주들과 그 원작 동화를 주로 다루고, 후반부에는 마블의 히어로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잘생긴 왕자와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디즈니 세계는 여러모로 비판을 받아왔다. 고루한 성 역할은 차치하더라도, 이 간단한 서사에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여러 조건이 들어있다. 우선 모든 공주들은 아름답고 선하다. 휠체어를 타거나 시각이나 청각에 장애가 있는 공주는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없다. 거기다 ‘착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규범은 아름다움이라는 특성과도 은근히 엮여 있다. 정신적 혹은 신체적 문제가 있는 인물은 사고나 상처받은 경험으로 인해 흑화한 악당들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동화를 보고 자라면서 장애인인 자신에게 은연중에 만들어진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어째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 없을까?”다시 B라는 책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다. B의 주인공은 엄마와 단둘이 사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내다가 이내 학대당하고, 결국 버려진다. 혼자 남은 뒤 배고픔과 불결한 환경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자기 집을 벗어나지 못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세간의 관심을 통해 그는 역으로 자신의 삶과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친구가 되고, 연애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집에서 요리도 하고, 나름대로 돈도 벌고… 적당히 잘 살게 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은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시각장 애인이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달랐을까? 나는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진보는 당밀처럼 느리게 전진한다. 인어 공주는 다리를 얻고 장애인 소년은 새를 구하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지만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는 장애인 소녀와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 아이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기적을 경험한 동화 속 인물들처럼 B의 주인공은 급격히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정신 질환이 있는 듯이 묘사되는 엄마의 폐쇄된, 불안한 세상에서 따뜻하고 호의적인 넓은 세상으로. 독자인 나는 그가 장애로 인한 불편함이 아닌, 비장애의 몸이 규범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겪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잔뜩 마음 졸인 걱정이 무색하게도, B의 세상은 그런 각박한 곳이 아닌, 동화 같은 세상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호의적인 세상이 그려지면 좋지,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그 세상이 장애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인 이들이 원하는 세상 같다. 어맨다가 말하듯, 그런 “다른 세계”는 없고, 장애인이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있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몸에는 그만의 행복도 있고,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장애인도 행복을 쟁취하려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아무래도 B는 시각장애인 소녀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굳이 넣은 작가에게 좀 묻고 싶다. 주인공의 어두운 어린 시절은 그토록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 했던 노력은 왜 없던 것처럼 넘어가는지, 그의 행복을 왜 호의적인 타인들에 의한 것인 양 그리는지. 나는 장애나 기타 이유로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 몸과 그 삶에 대한, 생소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읽어보고 싶어서 이 지면을 시작했다. 언젠가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를 꼭 만나 즐겁게 소개할 날이 오기를 정말 정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