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4

너드덤(Nerddom)에 입문하기

Editor. 신사랑

2000년에 등장한 미국 수사 드라마 ‘CSI’를 선두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할리우드식 수사극들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캐릭터 원형이 있다. 그들은 컴퓨터 해킹 천재들이며, 모든 테크 관련 능력자인 데다, 웬만한 과학분야 전반에 박사학위급 지식을 선보인다. 이렇게 엄청난 지식의 양과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수사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해내는 이들에겐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상과학과 판타지 장르물에 대한 무한 애정이다. 때문에 이들은 다른 캐릭터들과는 상반되는 별난 옷들을 입기도하고 그들의 사무 공간은 캐릭터 피규어들과 알록달록한 스티커 등으로 장식되어 ‘덕후’(오타쿠) 기질을 묘사한다. 소위 ‘너드’(nerd)라 불리는 이 비상한 괴짜들이 공상과학과 판타지 장르물에 열광하는 데에는 사실 매우 과학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인지능력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후가정(counterfactuals) 능력의 척도는 상상력, 창의성 등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 혁신적인 가설 설립을 가능케 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후가정 능력이 높을 수록 메타포, 알레고리, 우화적 비유담 등으로 가득 찬 공상과학 · 판타지 도서를 면밀히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Brainy is the new sexy.” (똑똑한 것이 이 시대의 섹스어필이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너드들이 각광받고 있는 지금, 청소년과 ‘덕후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우리도 그들이 열광하는 상상의 세계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엔더의 그림자(엔더의 게임 시리즈 외전편)』 오슨 스콧 카드
루비박스

“똑같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고방식과 관점이 다른 아이가 풀어나가는 다른 이야기다. 같은 사건이 진행되어가지만, 엔더가 보는 관점과 빈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도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서문 중
『엔더의 게임(Ender’s game)』은 2013년 영화로도 개봉되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엔더의 그림자』 는 시리즈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숨은 보석 같은 책이다. 이책은 『엔더의 게임』을 재미있게 본 독자들이라면 같은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한 번 더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느낄 수 있고, 혹은 엔더 시리즈를 전혀 모르더라도 독립적으로 철저하게 몰입할 수 있는 속도감 있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이다. 게다가 실제로 1985년 『엔더의 게임』이 출간되고 14년 후인 1999년에 집필된 책인 만큼 더 완성도 높은 심리 묘사를 보여주어 원작을 뛰어넘는 역량을 자랑하기도 한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소설이면서 사회적 이슈, 휴머니즘, 심리적 대립감 등을 철학적인 통찰로 날카롭게 써 내려간 과학소설, 『엔더의 그림자』. 이는 원작과 시간적으로 동일 선상에서 진행되어 ‘평행소설’ 혹은 ‘동반자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지평을 열며 ‘그림자 시리즈’ 출간의 계기가 되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엔더라는 천재 주인공의 그림자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는 소년 빈의 이야기는 실제 현실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 1985년 출간되자마자 경이적으로 휴고상과 네뷸라상을 모두 거머쥔 『엔더의 게임』에 비해 『엔더의 그림자』는 그 명성에 가려 책의 실제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직 엔더 시리즈물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면 이러한 관례를 깨고 『엔더의 그림자』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엔더 시리즈를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

『황금 나침반』 필립 풀먼
김영사

비평가들은 필립 풀먼을 J.R.R. 톨킨 『반지의 제왕』과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현대 판타지의 3대 거장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상하리만치 풀먼의 『황금나침반』은 그 진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 최고의 청소년 문학상인 ‘카네기 메달’이 설립 70주년을 맞아 ‘CARNEGIE OF CARNEG-IES’ (카네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를 온라인상으로 투표한 결과 그 영광의 상은 바로 『황금나침반』에 돌아갔다.또한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해 조사한 ‘영국 독자들이 꼽은 가장 귀중한 책’에도 10위권 안에 들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책은 영미권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논문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을 정도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국내 출판사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마케팅하여 아동문학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성인 대상 작품이다. 잘못된 마케팅과함께 2007년에 영화화되어 개봉한 작품이 흥행 실패와 함께 ‘원작 각색의 대실패’라는 혹평을 받았기에 더욱 국내 성인 독자들이 이 책을 접하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하지만 『황금나침반』은 물리, 역사, 문학, 신학 등을 총망라하고 고대신화와 스칸디나비아 신화, 성서 등을 절묘하게녹여낸, 절대로 놓쳐선 안 될 ‘이 시대의 대작’이다. 속도감있는 모험 스펙터클로 신비로운 캐릭터들과 환상적인 생물체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선악의 경계 해체,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 스토리라인을 관통하는 주제는 매우 묵직하며, 작가의 방대한 지식을 근간으로 웅장하고 설득력 있게 완성돼 있다. 풀먼의『황금나침반』은 판타지 장르 안에서만이 아닌 문학 총체적으로 꼭 읽어봐야 할 걸작임에 틀림없다.

『바람의 이름』 패트릭 로스퍼스
서울문화사

출간된 지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고전이 될 만한 요소를 갖춘 소설책이다. 고전이 되기 위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요소들이 모두 적절히 맞아떨어져야 하겠지만 판타지 장르의 고전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공통된 4가지 요소가 있다. 독창적인 스토리 구성, 공감대를 형성하는 등장인물, 섬세한 묘사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무엇보다 개연성이 충분한 세상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람의 이름』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완벽한 ‘고전 계승자’이다. 음악 · 모험 · 사랑과 상실로 가득한이 소설은 무의미한 탐험과 과장된 드라마로 채워낸 평범한 판타지가 절대 아니며, 유머 · 액션 · 마법의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매우 정교한 이야기다. 그리고 순수문학과대중문학의 경계를 넘어들며 뛰어난 문학성으로 기존 판타지 소설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린 『바람의 이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스토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왕 암살자 연대기’ 시리즈는 3부작으로 기획됐으며 현재2권까지 출간됐다. 그리고 조연들이 주인공이 되는 3편의단편소설이 최근 발표되었고,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또 다른 3부작으로 기획되고 있어 시리즈물이 완결됐을 때 오는 허전함을 아직은 꽤 오래 유예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니 몰입해서 읽던 책이 끝난 후 갑자기찾아오는 상실감을 경험해본 모든 독자들, 안심하고 로스퍼스가 펼쳐내는 환상의 세계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