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20

내 나이에 맞는 나만의 공간을 채울 마지막 기회!

Editor.전지윤

『나이듦과 수납 : 공간과 물욕 사이에서』
무레 요코 지음 / 박정임 옮김
문학동네

살던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태가 넘게 친정집 삼분의 일을 우리 세 가족이 사용하고 있다. 남편은 회사가 다른 도시로 이전을 해서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으니 일단 그의 짐은 아주 적고, 친정집이 워낙 큰 편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나와 아들의 물건을 넉넉하게 채워 쓰기에는 분명 좁다. 며칠 전엔 책과 장난감이 있는 방과 남편이 쓰는 방 베란다에 놓인 물건들을 꽤 버렸는데도 좀처럼 여유 공간이 생기지 않아 찝찝하다. 나는 수납과 정리에 관한 책을 종종 찾아본다. 그런 책에서 얻는 팁은 꽤 유용한 데다 깔끔한 집 내부 사진은 내 마음도 정리해 주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이듦과 수납』라는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한 사람이라면 ‘내가 원하던 정리에 관한 실용서가 아니네’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이 책은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나이듦과 수납』은 『카모메 식당』과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을 쓴 작가 무레 요코의 에세이다. 예순이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작가가 22년 동안 살아온 집 베란다에 쌓인 묵은 짐이며 오래된 물건들을 처분하며 생기는 고민과 생각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풀어 놓았다. 행여나 이 책에서 ‘내가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물건을 정리하고 수납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의 해결을 원한다면 그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나는 이렇게 내 오랜 물건을 정리하고 지금에 맞는 좋은 물건 몇 가지를 장만해야겠네’라는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거나, 막연하기만 했던 구닥다리 물건들이나 이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정리할 과정을 ‘미리 보기’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단, 만약 서른이 넘어 이제 ‘나이가 좀 들었으니’ 라이프스타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책을 찾았다면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노년이 되어가는 이의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상황과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듦과 수납』은 수납과 정리 전문가들의 책과는 다르다. 이 책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과 굳이 필요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처분하거나 최소한의 것만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그렇게 하려는 의도조차 없다. 오히려 작가 무레 요코는 잘 버리지 못하는 인간적 미련이 상당하다. 그는 어떤 물건을 처분하기로 결정하기까지 그 물건마다 얽힌 에피소드를 회상하고 이게 나에게 왜 필요했고 어떤 의미였는지를 반추한다. 앉아보고 입어 보고 맞추어 보는 과정이 재미있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해서 언제 다 버릴 수 있으려나 싶어 걱정도 된다. 실제로 작가는 계속 처분하면서도 ‘이래서는 턱도 없겠어’라는 걱정도 멈추지 않는다. 조금씩 버리면서 연신 무언가를 사는 것도 처음에는 의외라고 생각되어 ‘아니, 버리긴 왜 버리고 왜 또 사는 거야?’라고 혼자 중얼거린 게 대체 몇 번인지. 물건 줄이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야 하는 상황이긴 하다. 그래도 마음의 사치까지 줄이고 싶지는 않다. 그 언저리의 기준이 관대하다보니 마음의 사치와 물욕이 미묘하게 일치해서 그 조절이 어렵다. 진품, 아름다운 것, 자신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것, 마음을 채워주는 것을 모르는 인생은 역시 경박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정리정돈도 안 하고 물건이 넘쳐나는 것도 문제다.
젊은 시절의 멋진 패션 아이템들을 처분하는 게 스타일을 포기하는 게 아닌 새로운 스타일에의 탐구와 도전이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빳빳한 것, 무거운 것이 버거워진다.”라는 말은 꼭 내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작은 체구지만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디자이너의 옷에 앞코가 날렵하고 가느다란 굽이 있는 힐을 즐겨 신으셨는데, 예순이 넘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이고, 이런 것들 무거워서 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명품 가방들은 보관 주머니에 넣어놓고 얇은 천 가방만 들고 다니고 신발도 마찬가지로 더 큰 사이즈를 사서 뾰족한 부분에 솜을 채워 겨우 신더니 그마저도 요즘은 거의 스니커즈를 신는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어머니가 안쓰럽고 속절없이 흐르는 야속한 시간에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듦과 수납』의 무레 유코를 만난 뒤 어머니의 변화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머니 역시 새로운 스타일로 변화하고 적응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는 천 가방을 든 편안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70대 여성으로 진화해 있으니까 말이다.
바야흐로 백세시대(百歲時代)이다. 60대는 앞으로도 수십 년의 생을 앞두고 있기에 작가는 생의마지막을 깔끔히 정리하며 다 비우고 가겠다는 의지 실현을 위해 버리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무레 요코는 아주 적극적인 노년을 준비하면서 “몸도, 취향도 확 바뀐 인생 후반전, 새로운 감각으로 나만의 공간을 채울 마지막 기회!”라고 외친다. 노년의 몸과 마음에 어울리는 아름다움과 삶의 윤택함을 택한 그의 나이 듦을 더 응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