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19

나의 첫 독립출판물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책을 수집 중.

『투명일기』
이수진 지음

독립출판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무지렁이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매일 아침 독립책방 SNS를 기웃거리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입고되면 재고가 소진되기 전에 얼른 구매하고야 마는 지금의 일상은 당시만 해도 내 삶의 반경에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지인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독립책방에 방문했다가 나만 아는 비밀 아지트 같은 분위기와 바코드 없는 책들에 사로잡혀 버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혼자서 몇 번 찾아가곤 했는데, 책을 구매한 것은 몇 차례의 탐색이 지나고 나서였다. 독립출판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지라 처음엔 조금 퉁명스러웠다. 이렇게 얇고 크기도 작은 데다가 글도 몇 자 되지 않는데 웬만한 단행본은 사고도 남을 가격이라니. 신기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섣불리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크기도 두께도 제각각으로 꽂혀 있는 책더미에서 삼십 분 넘게 뒤적거린 끝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이 책 『투명일기』다. 독립출판물을 잘 몰랐기에 내용보다는 우선 외형에 눈길이 갔는데, 제목처럼 표지와 내지 일부가 뒤가 비치는 트레싱지로 되어 호기심이 일었다. 사장님은 반짝이는 내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새것으로 꺼내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산 독립출판물이 되었다.
이수진 작가의 『투명일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과 이별의 감정들을 활자와 사진, 디자인으로 표현한 책이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의 짧은 일기는 시간순이 아닌 불규칙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그날그날의 감정을 따라 함께 흘러가게 된다. 잊고 싶은 것과 잊어왔던 것들에 대한 기록은 페이지를 걸러 나오는 트레싱지를 통해 투명하게 내비친다. 트레싱지는 이 책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 역시 트레싱지를 활용한 편집 때문이었다. 색이 입혀진 필름, 그림이나 패턴이 그려진 필름 등은 뒤에 비치는 텍스트(또는 그림)와 묘하게 겹치거나 어긋나면서 시너지를 발휘한다. 하얀 종이에 까만 글만 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울림이다. 색이 번지는 필름을 넘기면 감정의 농도도 따라 변하고, 그림이 그려진 필름을 넘기면 쓸쓸한 부재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어느 주말, “다음 주 월요일의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로부터 평생을 그렇게 다른 사람처럼 살 수도 있을까?”라는 일기 위에 트레싱지로 선을 죽 그어버리고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라며 ‘다음 주 월요일’의 일기가 오는 구성은 결말을 미리 알고 보는 안타까운 서사를 엿보는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온전히 독자로서 음미하기만 했는데,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고 있자니 만드는 사람의 입장을 자꾸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투명일기』는 반으로 접어 가운데를 묶는 실제본 형태의 책인데, 이는 곧 트레싱지와 종이를 겹친 후 반으로 접었을 때의 페이지 구성을 고려해 텍스트와 디자인을 작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트레싱지가 알맞은 위치에서 뒷장과 맞물릴 테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히 가지고 있는 내용을 순서대로 죽 나열해 엮는 게 아니라, 애초에 책의 최종 형태를 고려하면서 내용을 구성해나갔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게 종이와 트레싱지를 재배열하는 과정 동안 작가는 지나간 감정의 배설을 몇 번이나 곱씹고 또 곱씹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다정했으며 때로는 허전하고 불안했을 날들을.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쓸 수 있다면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은 독립출판물을 만날 수 있는 책방도 늘었고, 내용과 구성에서 만족감을 주는 독립출판물도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책을 만든 제작자에 대한 정보나 책에 대한 리뷰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더 쉽게 이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손의 감각과 그날의 이끌림으로 만나는 독립출판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독립출판물을 충분히 구매할 수 있음에도 종종 낯선 책방에 가서 서가를 뒤적인다. 처음으로 혼자 책방에 가서 보물찾기하듯 찾아냈던 이 책처럼 다시금 독립출판물에 대해 새롭고 낯선 감각을 선물해줄 책들을 발견하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