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나무 바라보기

에디터. 지은경 자료제공. 창비 그림. © 한수정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현대 음악은 440㎐에 맞춰져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440㎐를 표준조율음으로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헌데 인간에게 이로운 주파수는 432㎐라고 한다. 이는 자연과 공명하는 주파수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긴장을 완화시킨다. 숲이나 식물이 많은 곳에서 절로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모처럼 갖게 된 휴식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반강제적인 격리가 인간의 자율 의지를 서서히 꺾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순도 높은 초록의 공간으로 달려가거나 432㎐의 음악을 찾아 듣는 것일 테다.
그런데 그보다 더 빠른 치유법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작가 중 한명인 헤르만 헤세는 정원 가꾸는 일을 몹시 좋아했다. 그는 나무를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써 내려간 평온한 분위기의 시와 산문을 읽노라면 자연의 주파수, 432㎐가 온몸에 퍼지는 듯하다.
“나무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한 움큼씩 가득 얻어 힘든 시절에 쓸 수 있게 보관할 수만 있다면!”
최근 들어 식물과 정원에 관한 책들이 많이, 그것도 너무도 많이 쏟아져 나온다. 나무는 언제고 멋지고 완벽한 존재이기에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별 시답잖은 허술한 구 성으로 만들어진 책들도 아주 많다.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쉬이 찾을 수 있는 정보들에 그림만 나열한 느낌이다.
올 초여름에 나온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은 그가 오래전에 나무와 삶에 대해 써내려간 시와 에세이를 담은 책이다. 또 책 안에는 그 질감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아름다운 세밀화들이 함께 들어있다. 자연과 미술을 엮어 그림을 그리는 한수정 작가의 작품들이다. 자연을 관찰하며 길러온 그의 통찰력이 헤세의 아름다운 글과 만나 한층 깊은 초록 시너지를 낸다.
“우리가 슬픔 속에 삶을 더는 잘 견딜 수 없을 때 한 그루 나무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조용히 해봐! 조용히 하렴! 나를 봐봐! 삶은 쉽지 않단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아. 그런 건 다 애들 생각이야. 네 안에 깃든 신(神)이 말하게 해봐. 그럼 그런 애들 같은 생각은 침묵할 거야.” _「나무들」 중
숲과는 달리 홀로 서 있는 나무들을 헤세는 ‘고독한 사람들’이라 칭하며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잎 빨간 너도밤나무와 잎사귀가 돋아난 포플러나무, 높새바람이 넘어뜨린 가장 큰 복숭아나무, 섬세한 가지를 떨군 자작나무들은 그들이 품은 햇빛과 바람, 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한다. 한수정 작가의 그림들도 헤세가 그리는 풍경을 따라 햇살 머금은 나뭇잎, 탐스럽게 열린 복숭아, 내리는 눈을 조용히 맞고 있는 겨울 숲을 담아내며 책 장 사이사이에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헤세는 글 곳곳에서 나무의 우아함과 존재가 가지는 깊은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랜 삶을 살았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생각할 줄 알며, 그렇기에 우리는 나무를 통해 자연의 다양성이 지니는 경이와 느림을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그에게 느림은 참을성의 또 다른 말로 “가장 힘들고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그가 “지상의 모든 성장, 기쁨, 번영과 아름다움은 참을성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이제 막 우리 곁을 떠났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가을의 한 페이지를 넘겨본다. 쓸쓸하기도 풍성하기도 한 가을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지도 생각해본다. 앞으로 찾아올 다른 계절 앞에서도 부지런히 헤세의 글을 꺼내 볼 것이다. 자연으로의 도피가 필요하거나 말없이 위로가 되는 좋은 친구가 필요할 때라면 더욱 좋겠다. 우리 모두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어려운 시간들과, 그 속에서 요동치는 마음과 직면할 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자연만큼 크나큰 위안과 평온을 안겨주는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September21_Inside-Chaeg_01_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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