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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선택한 책

July, 2021

귀한 그림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상자 쓴 아이』
신소명 글
곽규섭 외 3명 그림
최혜진 지음
데렉 스텔마 옮김
손들

‘귀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약간의 느끼함을 얹어서 무언가를 칭송할 때 쓰는 ‘값없다’와 달리 ‘귀하다’는 관계를 맺는 인간적인 노력에도 사용할 수 있다. 무언가를 값없이 대할 수는 없지만, 귀히 여길 수는 있다는 의미다.
집에 그림 몇 점을 모아두었다. 대단한 그림들은 전혀 아니고… 그중 가장 비싼 게 단돈 5만 원일 정도로 수수하지만, 작고 어수선한 집에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깜찍한 컬렉션이다. 공증까지 받은 그림들은 색칠된 면적에 비해 훨씬 큰 액자에 넣어 식탁과 책상 여기저기에 놓아두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야 뭐가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그림들을 모셔둔 이유는, 이들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보기에 귀한 그림’을 모으는 컬렉션에 그림책 한 권을 추가했다. 평소에 그림책을 자주 보는 마니아는 아니다. 이 그림책도 책보다는 그림 사듯이 구매했다. 책을 살 때는 우선 내용이 궁금하고 약간은 불온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에는 오래 걸릴 것 같은 책을 고른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따라 사거나 말거나 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림은, 뭘 그린 그림이든 간에 귀한 것을 산다. 『상자 쓴 아이』는 발달장애가 있는 그림작가들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책으로, ‘상자 쓴 아이’의 상자 속에 펼쳐지는 멋진 세계와 그 세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림과 글이 완전히 합치되어 한 줄기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책은 아니다. 네 명의 작가가 그린 서로 다른 그림들이 상자 속 아이의 이야기와 함께 걸어간다.
주인공인 상자를 쓴 아이는 이 책의 그림작가들처럼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로 그려진다. 이야기를 쓴 작가 신소명은 우리 안의 상자 쓴 아이 모두를 생각하자고 한 마디를 남겼지만,독자로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아주 특수한 그림들로 이 책을 읽었다. 네 명의 그림작가가 그린, 그들 각자의 상자안에 펼쳐진 세계가 워낙 생소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보거나 상상해본 적 없던 장면들이었다. 무얼 보든 잘 모방하고 빠르게 적응해서 ‘똘똘한’ 아이가 되고 싶던 나는 오로지 나만 아는, 미래에도 과거에도 없을 세상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상자 속에 펼쳐지는 줄줄이 이어지는 철길과 알쏭달쏭한 이름을 가진 역들, 악기가 열리는 나무, 색색의 구름을 지나는 우주선, 알록달록 정복을 입고 미소 짓는 요정들, 상자를 쓴 아이와 친구…. 이건 작가들의 상자 안에 함께 들어가지 않고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래서 너무 귀한 장면들이다.
장애 인권 운동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 운동에서 항상 화두가 되는 것이 ‘특별한’ 정체성으로 남을 것이냐 혹은 ‘특별하지 않은’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냐의 문제다. 나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특별한’ 것으로 남는 생활 속의 피로함과 지나친 관심, 잘못된 배려가 삶을 영위하는 데 더 치명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대중 가운데 홀로 숨어있을 수 있는 안락함을 나 자신이 끔찍이도 소중히 여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특별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것의 이분법을 넘어, 그저 귀한 것이면 된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인 동시에, 특별할 것 없이 귀한 인간이다. 우리는 그저 똑같이 귀하게 모두를 대하면 된다.
이 책을 기획한 ‘로사이드’는 예술가들이 결성한, 장애인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집단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타인의 작품을 통해서까지 세상과 대화를 시도한다. 예술가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작품을 통해 말을 거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발 담근 모든 이들이야 말로 귀한 예술가들이다. 그림을 그린 이들도, 그림을 보아준 이들도, 그림에 이야기를 붙여준 이도 말이다. 이분들 덕에 모기나 참외가 있는, 여름을 담거나 닮은 그림들뿐이었던 내집 컬렉션이 풍성해졌다. 상자 쓴 아이의 세계에는 계절이 없다. 아름답고 예쁜 것뿐이다. 그래서 상자 속 이 세상이 참 귀하다. 그 세상이 궁금하신 분들은 꼭 이 책을 사시기를! 심지어 글씨체도 예쁘다.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장면을 소장하는 것, 귀하게 모시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찬지, 여러분도 느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