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18

교과서에 없는 것

Editor. 김지영

복잡한 삶을 살지 않기로 했다.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내키는 대로 살아야겠다.

『은수저』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학산문화사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하곤 한다. 바람 불면 나풀나풀 날리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각기 짝을 지어 다니는 거리를 샌들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고 있노라면 자유롭기 짝이 없다. 그날도 인파를 뚫고 만화방에 입성해 허전한 속을 달랠 겸 데리야키 치킨 덮밥을 주문하고 책이 켜켜이 쌓인 책장을 훑으며 ‘오늘의 만화’를 골라 자리에 앉았는데(그래 봤자 어쩔 수 없는 팬심에 『원피스』를 고르지만), 유독 앞자리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라카와 히로무의 작품 『은수저』였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만화였지만, 농업 고등학교라는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소재 탓에 서스펜스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아 읽을 날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런데 그날 무엇이 그리도 재미나는지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앞자리 사람의 어깨를 보며 읽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사람이 책을 다 읽고 갖다 놓으면 봐야겠다는 생각에 한참 기다렸지만 (책은 다 읽었는데 쌓아놓고 반납하지 않더라, 진상 중 진상) 결국 백기를 들고 만화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만화방 『은수저』 쟁탈전에 몇 번 참여했지만, 매번 고배를 마신 바람에 전자책을 구매했다.
『은수저』는 중학교 내내 학업 스트레스와 아버지의 압박을 받아온 하치켄 유코가 그간 당해온 억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홋카이도에 위치한 오오에조 농업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벌어지는 일상을 그린 만화다. 하치켄은 도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끝없이 광활한 대자연에 둘러싸인 오오에조 농고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지만, 농가의 자식이 대부분인 동급생들과 지내면서 서서히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간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틈틈이 공부와 마술(말을 타는)부 활동까지 하며 몸이 건강해지는 걸 느끼며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해낸다. 하지만 그간 공부만 하고 지냈고, 과도한 일을 떠맡는 바람에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로 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만화가 농사짓는 법, 가축 키우는 법만 다루는 건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농촌의 현실과 더 나은 농업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다. 재미있는 장면을 예로 들자면 누군가 컴퓨터실에서 성인사이트에 접속해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사실이 밝혀지자 선생님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걸고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학생들과 달달하고 행복한 파티를 꿈꿨던 남학생들이 “농촌에는 아내가 있는 청년이 없어!” “나는 실제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등 울부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농촌에 젊은 여성의 수가 적은 현실을 작가만의 유머로 표현한 장면이다. 비슷한 다른 예로는 친구네 농가에서 어린 여자아이 둘이 가족과 함께 밤늦도록 일하는 모습을 본 하치켄이 “UN 아동권리조약이라고 아니?” “근로기준법이란 게 있어”라고 말하는 모습도 웃음을 자아낸다.
내가 하치켄이 된 날, 목적 없는 삶이나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렇다 할 심리학책보다 이 만화를 보면 어떨까 싶다. 지인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타인의 경험담에 불안해하고, 자신의 삶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최근 나 역시 왜 문제인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고민이 생기자 타인에게 의지해 해결해보려 했던 것들은 결국 스스로를 바닥없는 늪으로 끌고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키는 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네 인생은 교과서에 다 나와 있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