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April, 2015

고독의 조건

Editor. 유대란

‘미혼이세요?’라고 물으면 ‘아니요, 비혼입니다’라고, ‘자취하세요?’라는 질문에는 ‘아니요, 혼자 살아요’라고 대답한다. ‘미혼’은 결혼이라는 종착역을 향하는 도중 잠시 들르는 간이역 같은 미완의 뉘앙스를 풍기고, 자취는 외로움과 처량함을 동반한 초라한 식탁, 깨워줄 사람 없는 아침 시간, 구김 간 셔츠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내게 결혼은 안정과 완결을 의미하지 않을뿐더러, 독거는 순수하게 선택에 의한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빠듯한 임금을 쪼개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독립의 전제가 결혼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 해장국을 끓이고, 태국 요리를 시도한다. 공간에 어울리는 러그를 고르고, 독거에 최적화된 가전제품과 각종 집기를 활용해서 다들 꽤 실속 있고 그럴듯하게 삶을 꾸린다. ‘자취’ 와 ‘미혼’의 시대는 진즉 끝난 것이다. 1인 가구를 겨냥한 인테리어, 식품, 서비스 산업에서도 이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홀로’가 이리도 높은 위상을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혼자 식당이나 술집에 가는 일만은 여전히 좀 꺼려진다면? 이럴 때 거리낌 없이 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멋있어 보일 수 있는지 재차 그려볼 필요가 있다.고독은 능동적일 때 근사해지고, 사람은감정적으로 독립했을 때 자유로워진다.그리고 혼자인 것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고독한 미식가』 다니구치 지로
이숲comics

주인공은 중년을 바라보는 무역업자로서 혼자 일하고 혼자 식사한다. 결혼도, 점포를 얻기도 마다하는 그는 사업상 곳곳을 누비며 지역의 요리를 즐긴다. 추억이 깃든 식당에서 익숙한 맛을 즐기기도 하고, 처음 발을 들여놓은 지역의 낯선 식당의 문턱을 넘으며 조리장의 취향과 음식의 맛을 예측해보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홀로라는 사실은 그를 소심하게 만들지 않는다. 외려 그는 스스럼없고 자유로워진다.
그는 18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내키는 곳에서 내키는 음식을 즐겁게 소화한다. 초밥, 마메칸, 야키만주, 타코야키, 편의점 음식 등은 하나같이 일본 특유의 간결하고 소박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가 미식과 과식의 자유를 만끽하는 와중에 독자는 배고파진다. 음식을 묘사한 그림 자체도 군침을 돌게 하지만 식당의 분위기, 요리사, 주인 및 장내 손님들의 모습이 음식과 소소하고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독자의 공감대와 미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작은 반전들에 있다. 주인공이 선택한 음식은 당혹스럽게도 때로 맛이 없다. 식당과 메뉴 선택에 종종 실패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듯 작중 그도 매번 포만감과 만족감만을 쟁취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에겐 탓을 돌릴 일행도 그럴 심산 따위도 없다. 선택과 결과는 오로지 홀로의 몫으로 남는다. 음식에 대한 것도, 사업에 관한 것도, 사랑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자취의 달인』 성지현
ITI

자취 생활 10년 지기가 홀로살이의 노하우를 공유한다. 집을 고르는 방법, 골목의 조건, 가구 배치부터 냄비 고르기, 좁은 집에서 이불 빨래 말리기, 스팸계란 반찬에서 벗어나기, 벌레 퇴치법, 부모님 전화에 대응하기 등 생활밀착형 정보를 그림과 함께 술술 털어놓았다.
혼자 살기는 나태함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예고 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불안한 감정과의 줄다리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혼자 살면서 봉착하게 되는 크고 작은 감정적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일러준다. 걷잡을 수 없이 무서운 상상에 사로잡힐 때 웃기는 만화책을 보고 마음이 헛헛한 날을위해 보리차를 대량으로 끓여놓으라고 권한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날 직접 실천해봤다. 웃긴 책이 있나 책장을 들춰보고 보리차를 끓이려고 물을 올리는 순간부터 안도감이 슬쩍 드리웠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팍팍했던 마음이 유연해진다.
독립을 앞두고 있다면 이케아 사이트를 들락거리기보다 이 책을 탐독하기를 권한다. 혼자 사는 데 이미 익숙해진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관객 없는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방치해뒀던 생활의 구석구석을 재정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생존하는 작가 중 맥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다. 그는 한 산문집에서 자신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맥주를 좋아하고 조개를 먹지 않는 보통 남자” 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하루키의 글에는 맥주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고 소상하게 등장하며, 묘사에서는 이 황금빛 음료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읽힌다. 독자는 하루키 작품 속의 주인공이 맥주를 걸치는 장면에서 그를 작가와 동일시하며 작가가시원씁쓸한 음료를 꿀꺽 넘기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 속에서 주인공이나 화자는 주로 홀로다. 그가 홀로 간단하게 안주를 만들고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자주 가는 술집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고독을 즐기는 모습은 작가의 깔끔무쌍한 문체만큼이나 쿨하다.
이런 하루키의, 제목도 쿨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1984년부터 작가가 『Classy』라는 잡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산문집이다. 작가의 수작만 엮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글과 지면에 함께 실렸던 안자이 미즈마루의 미니멀한 삽화들이 수록되어 도회적인 감성이 물씬 난다. 이 책을 끼고 늦은 저녁, 맥주를 마신다면 그곳이 싸구려 DIY 소파 위든, 음울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술집이든, 혼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꽤 근사하게 느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