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18

결코 친절하지 않은 책

Editor. 김지영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샌들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고 있노라면 자유롭기 짝이 없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닉 수재니스 지음,
책세상

책(Chaeg)에 입사한 지 한 달이 갓 지났을 때, 「새로 나온 책」 원고를 작성하던 중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를 발견했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밝히지만, 이 책은 일부러 소개 도서에 넣지 않았다. 보통 한 권의 책을 200자도 안 되는 분량으로 소개하는데, 이 책 소개는 200자는커녕 600자여도 모자랄 판이어서 어쩔 수 없이 제외해야 했다. 내 능력 부족도 이유가 되겠지만 당시 내게는 책 내용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그리고 198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책을 소개하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했던 탓에 (관계자분들께 무척 죄송했지만) 목록에서 이 책을 삭제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
철학을 주제로 어떤 책을 소개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이 책이 떠올랐다. 「새로 나온 책」 원고를 쓰면서 읽고 싶은 책이나 나중에 기사 쓸 때 도움 될 책 같으면 따로 목록을 만들어 정리해두곤 하는데, 이 책이 입사 후 초반에 발견한 책이라 항상 엑셀 파일을 열면 상위에 있어 눈에 띄는 바람에 기억하고 있었다. 책에 미안한 마음이 살짝 있어서이기도 하고.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출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2016 린드 워드 그래픽노블상, 2016 프로즈상 등을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출간한 최초의 만화책’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콜롬비아 대학 최초로 논문 심사를 통과한 만화 형식의 논문인데, 기존 연구방식을 뒤엎고 언어와 이미지를 중첩해 새로운 사유법을 선보여 실험적 시도라는 호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독자에게 문자만으로 의미를 전달하던 방식을 뒤로하고 이미지가 문자를 통해 의미를 품고, 그 이미지가 독자에게 뚜렷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은 1차원적 사고와 행동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가능성에 제약을 두는, 시야가 단조로운,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가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 우리가 사는 세상과 어딘가 무척이나 닮았지 않은가? 에드윈 애벗의 『플랫랜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모든 것이 납작한 평면의 2차원 플랫랜드에 사는 정사각형이 1차원인 라인랜드의 점과 선에게 2차원 공간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3차원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구를 만나 3차원 혹은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추론과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앞으로 우리가 떠날 여행의 목표와 완전히 부합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발견하고,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고, 생생하게 깨어 있기 위한 ‘신선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이야기를 플랫랜드로 시작한 이유는 자유롭게 상상하고 유연하게 사고해야 하며,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끊임없이 상상한다면 더 넓은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도출한 사유를 통해 바라보는 것 말이다. 남의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것보다 내 신발을 신고 걷는 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이 만화, 그래픽노블로 분류된다고 해서 결코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읽는 것만으로도 이해되는 학문이 있는가 하면 읽은 후 사유를 통해 체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또 다른 사유를 내놓아야 하는 과정을 품은 책도 있다. 바로 이 책처럼. 이 책이 품고 있는 닉 수재니스의 사유의 철학은 읽히는 것조차 불친절하다. 하지만 한장 한장이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문장과 그림의 연속일지라도 끝까지 읽고 나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철학은 어렵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그중 가장 큰 이유 하나만 대자면 ‘철학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이나 수학처럼 공식만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문학처럼 감상을 통한 각자의 느낌이 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의 생각,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을 학문화했으니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어렵다고 철학을 등지고 살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철학을 기반으로 한 국가, 제도, 윤리 안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철학이 관통하기 때문에. 철학은 변화하는 인간의 길을 함께 걸어왔고 그 자체로 역사가 됐다. 지금도 앞으로도 또 다른 새로운 사유가 등장해 세계를 바꿔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