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9

걷는 재미가 왜 없지?

Editor. 전지윤

글은 말보다 느리지만 친절하고 명확합니다.
듣기 싫은 말은 귀를 닫으면 그만이지만, 글은 오히려 반추할 시간을 줍니다.
법정 스님은 좋은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고 했지요.
그러려고 읽어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외 2명 지음
을유문화사

“엄마, 왜 차로 안 가고 걸어서 데리러 왔어?”
“걷기에 멀지 않고, 바쁜 일도 없으니까. 유럽에서 다닐 때는 훨씬 더운 날, 더 오래 더 많이 걸어 다니고 했잖아.”
“그 때랑 지금이랑 달라. 그땐 걷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없어. 걷기가 싫어.”
걷는 재미라… 엄마가 살았던 곳 중에 두 번째로 오래 살았던 데서 저도 살아보고 싶다 하여 감행한 런던에서 두 달 살기를 하는 동안 우리의 주요 교통수단은 두 발이었다. 아이는 일어나면 물병, 책, 큐브, 겉옷 등을 배낭에 담았고, 한번 아침에 집을 나서면 우리는 종일 걸었다. 걷다가 힘들면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 풀밭에 앉거나 누워 쉬었다. 길가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가 원하는 음료수를 주문하고 마시는 여유도 부렸다. 오래된 도시의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볼 거리와 보물이 구석구석 숨어 있어, 이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골목 도시를 다니는 것은 아이의 표현대로 ‘매일같이 신나는 이벤트이고 보물찾기 놀이’였다. 공원이 크지 않아서, 도로가 너무 넓어서, 차로 다니는 것에 익숙해서 등등 우리가 생각해 본 이유들도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 땐 맞고 지금은 틀린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은 저자 유현준이 2015년에 신문 등 매체에 실은 기고문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아침 신문에서 가끔 읽었던 그의 글에서 보이는 해박함, 일반 독자의 흥미와 눈높이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노련함, 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고민을 동반한 통찰력이 신선해서 출간된 해 손에 넣었다. 이 책은 건축물과 수많은 건축물들이 모여 생겨난 도시와 도시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도시가 자라고 변화하는 이야기를 입담 좋은, 아니 글발 사는 건축과 도시설계 전문가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이라면 누구나 궁금하거나 불만일 수 있는 이슈들도 잘 집어내 적당한 선에서 알려주니 교양서로 충분하다. 그래서 문득 왜 내가 사는 동네는 아이조차 걷는 재미가 없다고 하는지 궁금해졌을 때 다시 집어들 만큼 접근성도 충분한 책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지 질문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떤 상황과 환경에 놓였고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해왔는지, 시간의 흐름, 삶과 문화, 역사 전반에 대해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시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과 추구하는 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불편함과 부족함 등은 도시가 그 답이건 실마리건 알려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걷는 재미가 왜 없는지, 분명 내가 사는 집에서 횡단보도 한 번만 건너면 있는 공원을 두고 공원 녹지가 부족해서 삭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 이 책은 다양한 관점과 논리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답은 전 권에 걸쳐 있다.
지난 주 학교 수업을 끝내고 나와 학원에 가기 싫다 하는 아이와 함께 남산야외식물원에 다녀왔다. 굳이 아침부터 종일 한 건물에 있던 아이에게 또 다른 건물, 심지어 이번엔 더 작은 교실에 갇혀 있게 놔두기엔 너무한 생각이 들어, 조금 평화롭고 느리게 오후를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야생 들꽃 이름 찾기, 풀 뒤에 숨은 꿩 찾아 인사하기, 산책 나온 강아지마다 손 흔들어 인사하기, 연못의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넘기며 별것도 아닌 것으로 재미와 행복을 찾는 시간을 함께 나누니 나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 높은 곳에 다다라 한강 건너편 전망이 보이는 곳에 서니 줄지어 서 있는 아파트들은 더 날카롭고 높게 솟은 듯 보였다. 그 뒤로 보이는 고층빌딩들도 왠지 서 있는 자리가 좁다 아우성 치며 뽐내는 듯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서울이란 도시와 서울에 사는 많은 이들, 한국이란 나라에 태어나 사는 대다수가 지금까지 위로 밟고 올라가는 데 집중했다면, 서서히 질적 가치로 그 포커스가 옮겨갈 것이고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며 다시 발 아래 도시를 바라본다. 그럴 때 도시는 또 변화한 모습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할 것이라 기대하며, 저자의 다른 책 페이지를 넘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