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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16

개와 돼지들의 민주주의

Editor. 한진우(메디치미디어 편집자)

사무실 저 멀리 있는 청와대를 보며 국정원에 끌려가기 딱 좋은 공상하기가 취미인 편집자.
그런데 진짜로 국정원에 끌려갈 만한 원고를 맡았다.
혼자 죽지 않기 위해, 마케터 허 팀장님의 반정부 발언을 몰래 녹음하고 있다.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지음,
미치하라 카츠키 그림
이타카

어떤 픽션이 우리 일상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달콤한 로맨스 소설이나 낭만적인 로드무비라면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장르가 ‘미스터리 스릴러’라면? 혹은 ‘정치 호러’ 라면, 현실 속 우리 일상이 유지가 될까? 아닐 것이다. 저 두 장르의 잘못된 만남이 획책된 사회는 민주주의 근간과 시민의 삶이 부정되는 지옥 같은 곳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민주주의와 그에 대한 시원한 독설을 음미하기 위해 『은하영웅전설』을 꺼내봤다. 이 SF 장편소설에서는 부패한 민주주의가 무능한 정치인과 독재자를 낳는 과정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1인 1표’라는 이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민주주의 공화국 국민이, ‘개와 돼지’로 희화화되는 곳이 있다면 저 책은 꼭 읽어봄직하다.
픽션은 언제나 현실보다 잔인하다
매우 안타깝게도 어떤 나라는 미스터리 스릴러와 정치 호러가 동시상영 중인 4D극장이다. 부패한 정권이 맹목적인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언론과 기업을 장악한 채 10년 정도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적국과의 교전이나 대참사가 끊이지 않고, 무능한 정권은 국민을 가르치려 들다가 가끔 본심이 튀어나와 국민을 개와 돼지에 비교하곤 한다.
‘일부’ 정치인이 민주주의 시민을 개와 돼지로 비유하는 것은 독재의 독버섯이 양지로 나올 징조다. 독재의 자양분은 정치인의 부정에 눈감은 시민이며, 그곳의 부패한 민주주의와 시민은 전제정치와는 다른 의미에서 소수의 독재를 용인한다. 양 웬리의 말처럼 “부패한 민주주의는 독재라는 화초의 온실”인 것이다.
부패한 민주주의는 독재정치라는 화초의 온실
『은하영웅전설』의 팬들은 양 웬리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을 두고 누가 최강인지 논쟁을 벌이지만, 최강자 후보에는 자유행성동맹의 부패한 정치인 욥 트뤼니히트도 끼워줘야 한다. 그 또한 공화국을 멸망으로 몰고 감으로써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욥의 특기는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모습을 감췄다가 여론이 잠잠해지면 어느 새 다시 나타나 애국심과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언론은 그의 편에 서서 대중의 인기가 그에 집중되는 것을 돕고, 기업은 정치자금을 바친다. 정부 각 부처에 내려앉은 낙하산들은 그에게 충성하고, 정부 조직은 점점 무능해진다. 욥은 탁월한 처세술로 민주공화정의 수장이 되었지만, 통치자로서 철학은커녕 철저하게 무능했다.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벙커의 중심에서 전쟁을 외치다
뭔가 큰일이 터졌을 때마다 관저나 벙커에 숨거나, 정치적 위기 순간에 해외 순방을 계획하는 이는 욥 트뤼니히트의 매우 훌륭한 현신이다. 전사자를 ‘조국에 목숨을 바친 위대한 자들’로 포장해 군부의 무능과 비리를 감춘다.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조성되면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불순한 의도’라고 비난한 다음, 국가에 자긍심을 가지라고 훈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법을 만들어 다음 독재의 씨앗을 준비하기도 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인데 왜 이리 입맛이 쓸까
농부는 밭을 일궈서 나라를 구하고,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서 나라를 구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어떤 위정자들은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그들 밑에서 시민들은 멸망한 자유행성동맹의 시민처럼 거대한 정치적 회귀의 연대기를 경험하고 있다. 『은하영웅전설』에서 최고의 독설가는 주인공 양 웬리지만, 최고의 독설은 양심적인 정치인 황 루이라는 인물이 남겼다.
“정치가란 게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였던가? 우리는 사회의 생산에 뭐 하나 기여하는 게 없네. 시민들이 내는 세금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재분배하는 일이나 하면서 봉급을 받아먹는 존재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사회기구의 기생충일 뿐이라고. 그게 잘난 존재로 보이는 건 선전 결과로 인한 착각일 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