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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7

가상현실(VR) 게이머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재와 환상의 그림갈』

Editor. 한진우(메디치미디어 편집자)

사내 디자이너에게 영화 <클로버필드>를 추천하며 “클로버가 잔뜩 핀 미국 중부 시골동네에서 새침한 여자 교사와
도시에서 전근 온 남자 교사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라고 거짓말했다가 제주도 워크샵에서 공개처형을 당했다.

『재와 환상의 그림갈』 주몬지 아오 지음
대원씨아이

피투성이 다리를 질질 끌며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걷는다. 이 미친 저택에 일분일초도 더 있고 싶지 않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딸깍 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집 밖의 환한 빛이 시야를 밝힐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부서질 듯 붙잡는다. 돌아보니 ‘그것’이 흉측하게 웃고 있다. “아들아,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 ‘그것’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간다.
이번 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가상현실(이하 VR)라는 말을 듣고 더욱 실감 나는 칼럼을 쓰기 위해 ‘바이오하자드7’ 데모와 플레이스테이션 VR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위에 썼다시피 저택에서 탈출하기 직전에 집주인이자 이제 괴물이 되어버린 ‘그것’에게 붙잡혀 암흑 속으로 끌려갔다. 직접 체험해봐야 알 테지만 이미 VR 기술은 사용자가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근래에는 아이돌그룹이 앞다퉈 VR 360도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하고 있다. ‘우주소녀’와 ‘여자친구’를 구분 못 하는 나 같은 사람도 눈앞에 아이돌 가수가 춤추고 노래하는 광경이 펼쳐지면 당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된다.
VR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콘텐츠도 더욱 정교해진다면 기존 엔터테인먼트에 더해 교육, 스포츠, 군사, 관광,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자기 방에서 VR 기기를 쓰기만 하면 올드 트레포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경기를 관전하고, 알프스 설원에서 스키를 타고, 1945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고, 빅뱅부터 빅프리즈까지 우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VR의 출력 기술은 시각과 청각을 이용한 제한적 몰입형 VR을 재현하는 수준이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려면 뇌-인터페이스 컴퓨터를 이용한 완전 몰입형 VR이 재현되어야 한다. 완전 몰입형 VR을 판타지 세계에 대입한 소설은 『소드 아트 온라인』과 『재와 환상의 그림갈』이 있다. 확실한 재미를 보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드 아트 온라인』은 판타지 VR이 배경인 서브컬처 콘텐츠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줄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평범한 고교생이 판타지 VR에서 최고의 검사로 거듭나고 외로운 늑대처럼 살다가 그 세계의 아이돌 격인 여주인공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모든 악의 원흉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일견 일본 오타쿠들의 어두운 욕망을 집대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한 이유가 있다. ‘만약 VR 운영자가 이용자를 볼모로 잡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상상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VR 수준에서는 VR 콘텐츠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HDM을 벗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미래에 침습식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대중화되고 VR 기기와 우리 뇌가 직접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게임 운영자가 이용자를 게임 속에 감금하거나 지속적인 고통을 가할 경우 입법부와 사법부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약취, 유인 및 인신매매의 죄’가 성립하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편 『재와 환상의 그림갈』은 『소드 아트 온라인』의 대척점에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초반 이야기는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로 대변된다. 대부분의 MMORPG 튜토리얼은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하여 눈앞의 고블린을 도륙하세요’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작중 주인공 일행 다섯 명은 작은 고블린 하나 제대로 사냥하지 못한다. ‘우리, 고블린보다 약한 거 아냐?’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만약 내가 특별한 능력도 없이 판타지 세계에 뚝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운 좋으면 첫 전투에서 과다출혈 쇼크사고, 운 없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굶어 죽을 것이다. 『재와 환상의 그림갈』은 애니메이션으로 영상화되었으니 꼭 보 기를 바란다. ‘Rainy tone’이라는 노래에 맞춰 눈 덮인 언덕에서 일행이 첫 번째 여정을 마무리하는 장면은 당신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