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인터뷰

4·3이 건져 올린 희망,
작가 허영선

에디터: 이희조
사진제공: 신형덕

그러니까 볶은 콩에서도 싹이 난다. 이 말씀은 콩을 볶을 때 다 볶는 것 같은데도 거기서 몇 알은 튀어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그 튕겨나간 푸른 콩이 흙에 묻혀서 어느 봄날 푸른 싹을 틔워내기도 하는 운명. 그러니까, 가장 비극적인 풍경 속에서 피어난 콩알 하나는 희망의 콩알이지. 그건 인간에게 내린 선물, 기적의 또다른 이름이지. 그럼에도, 그 혹독한 생을 뚫고 살아낸, 살아남은 용감한 자들에게 수그려 할 수 있는 말이지, 지상의 통곡이 피워올린 희망의 말씀이시지.
—「볶은 콩에도 싹이 난다」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었겠지만』 중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4·3 연구소 소장으로, 또 제주 4·3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평생을 4·3과 함께해온 허영선 작가. 수십 년간 깊숙한 마음 한구석에 묻혀있던 체험자들의 고통과 슬픔은 그녀를 거쳐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언어를 얻는다. 그리고 이 언어들은 아픔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심어진다.

올해 4·3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작년은 4·3 70주년이라 1년 내내 행사가 많았는데, 올해도 3, 4월은 무척 바쁘게 보냈어요. 연구소에서 직접 주최한 행사나 연대 행사, 위령제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죠.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으신가요?
4·3 연구소에서 올해 18번째로 증언본풀이를 진행했어요. 3월 말에 제주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4·3 직접 체험자(체험 1세대)를 세 분 정도 초청해서 일대일 대담을 진행하는 행사예요. 올해는 4·3 속에서도 그늘에 있는 분들을 모셨어요. 창상(창에 찔린 부상) 혹은 총상 등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고 살아왔는데도 후유장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분 등을 모셨죠. 당시 12살 소녀였던 이 할머니는 실종된 오빠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토벌대한테 감금당해 엄청난 고문을 당하셨어요. 그때 일로 후유장해가 생긴 지도 모른 채 지금은 여든이 넘으셨죠.

후유장해인지 왜 몰랐던 건가요?
다른 사람도 총에 맞고 같이 당하고 다 이렇게 겪고 산 줄 안 거죠. 어떤 분은 얼마 전에도 저를 찾아와서 “병원에 갔더니 엉덩이가 너무 딱딱해서 침도 안 들어가는 걸 보고 의사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더라. 4·3 때 매 맞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하니까 의사가 4·3 연구소에 가서 후유장해 신고를 하라고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들어보니 16살 때 닷새 동안 엄청나게 매를 맞다가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면서 겨우 매질이 끝났대요. 그 뒤로 귀 한쪽이 멀고 몸이 부자연스러웠는데, 여태까지 그걸 후유장해라고 인지 못 했던 거죠.

모른 채로 돌아간 분도 많겠네요.
거의 다 모른 채 돌아가셨죠.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4·3에 대한 배·보상을 요구 중이고 특별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는데,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이에요. 제주도민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정부 차원에서 끝까지 진실 규명하고 희생자들 명예 회복에 노력하겠다고 문재인 정부가 말하기도 했고요. 그런 면에서 보면 4·3은 과거사 진실 규명 차원에서는 상당히 모범적인 사례예요.

작가님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라셨는데요, 처음에 어떻게 4·3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제가 『제주신문』 공채 여기자 1호인데요, 87년 민주항쟁이 일어나면서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제주신문』에서도 4·3을 취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죠. 이후 『제주신문』이 『제민일보』로 바뀌면서 ‘4·3은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4·3의 증언 채록을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4·3 연구소도 창립되었으니 1989년이 4·3 운동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죠. 당시 저는 문화부 기자였기 때문에 깊게 뛰어들진 못했지만, 어떤 취재에 나가든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애를 들어보면 반드시 4·3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4·3 없이는 제주도에 문화가 있을 수 없고, 자연이 있을 수 없고, 신화나 민속이 존재하기 힘들겠구나’ 느꼈죠.

허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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