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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6
위스키 마시는 남자
Editor. 유대란
몸에 나쁘고 후회가 예정된 일들에 투신한다.
소독차를 보면 쫓아가고 비 오는 날 나는 기름 냄새를 좋아한다.
위스키에 나물 안주를 먹을 때 행복하다.

지음북하우스
몇 년 전까지 위스키를 몰랐다. 투명한 갈색 음료가 식도를 통과할 때 내뿜는 뜨끈함이 불쾌했고, 코와 혀에서 맴도는 무직한 향이 좋지 않았다. 위스키는 여러모로 어중간했다. 소주를 마실 땐 그것이 권리라도 되는 양 세상의 온갖 번뇌를 짊어진 듯 오만상을 찌푸릴 수 있었고, 황금빛 탄산이 지글지글 올라오는 맥주는 축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주스를 넣어 마시는 보드카는 지루할 틈 없이 넘길 수 있었고, 테킬라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게 해줬다. 이 와중 위스키는 소주처럼 애달프지도, 맥주처럼 신나지도, 테킬라처럼 속도가 아찔하지도 않았다.
위스키를 마시게 된 연유는 막되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고 순전히 숙취가 완만한 장르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렇게 발을 들인 이 세계는 끝도 출구도 없었다. 김장김치가 집집이 맛이 다르듯, 위스키도 그렇다. 생산 지역, 증류소, 숙성 기간에 따라 경우의 수가 참 많다. 그것을 하나둘 알아가는 것이 어느새 즐거웠다.
이전엔 콱 죽고 싶었을 일들을 웃어넘기게 되고, 쌍수를 들고 기뻐했을 법한 일들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많아진 시기엔 작정하고 취하고 싶은 날들이 별로 없다. 그런 미지근한 날들엔 위스키를 마시는 게 제법 어울렸다. 행복이 귀여운 무녀리 같은 존재라면 불행은 한배에서 나온 덩치 큰 형제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위스키를 즐길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한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하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그건 좀 우쭐한 마음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문체나 장르를 뜻하는 ‘하드보일드’는 ‘단단하게 삶은 달걀’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루키가 찬양한 대로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드보일드의 대가로서 냉혹한 세계와 ‘필립 말로’ 라는 불세지재의 비정함을 품은 ‘까도남’을 탄생시켰다. 챈들러가 쉰이 넘어서 발표한 첫 장편 『빅 슬립』의 주인공인 사립 탐정 필립 말로는 셜록 같은 천재적 직관을 지닌 유형도, 체스터튼이 발명한 브라운 신부처럼 남다른 이타심을 지닌 유형도 아닌 새로운 캐릭터로서 고객의 요구에 충실하기 위해 움직일 뿐, 감정적 동요를 절대 보이지 않는다. 말로를 고용한 대부호 스턴우드 장군은 이런 그를 신뢰한다. 장군의 망나니 같은 두 딸 카멘과 비비안이 연루된 사건과 배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말로는 끊임없는 위험과 유혹에 노출되는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쿨하기 그지없다. 도박업주가 겨눈 총부리 앞에서도 너털웃음을 짓고는 그와 전략적 우호 관계를 맺는다. 반라의 팜므파탈이 콧소리를 내며 달려들 때도 쿨함을 잃지 않고 신사적인 정도의 시니컬한 면박을 건넨다.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는 “나는 내가 너무 똑똑한 것 같았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소설의 배경은 또 어찌나 쿨한지. 말로가 활약하는 금주법 시대의 부패하고 황량한 도시는 필름 누아르를 위해 태어난 곳 같다. 캘리포니아 남부라고 하지만 그곳은 음산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말로가 1인칭 시점으로 도시의 구석구석을 묘사할 때는 필름 누아르 속 남자 주인공의 저음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보이스오버’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뭐니 해도 필립 말로에겐 외로움과 위스키가 어울린다. 그는 시종일관 술을 마신다. 대부분 위스키다. 그는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지만, 그가 위스키를 병에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지,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는지, 야금야금 아껴 마시는지를 살펴보면 이 쿨한 남자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득의만면의 표정을 짓는지 감지할 수 있다. 쿨함의 도가 지나치면 자칫 우스워질 법도 한데, 지나침 마저 지나치면 예술이 된다. 말로는 마초맨들의 롤모델이자 위스키 맛을 좀 알기 시작한 술고래들이 닮고 싶은 ‘드링커’다. 그는 우리의 어리석고 낭만적인 객기를 부추긴다.
시가, 화약, 오래된 페르시안 카펫, 타다 만 양초, 오래된 책의 가죽커버 냄새가 뒤섞인 도시의 음지를 상상하며 한잔 해보면 어떨까. 필립 말로를 창조한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주, 지나치게 자주 그랬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