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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6

‘열정’이라는 딜레마

Editor. 박소정

평소 목소리가 작지만 할 얘기는 조곤조곤 다하는 실용파임과
동시에 좋아하는 일도 누가 시키면 갑자기 하기 싫어하는 청개구리파.
하지만 누가 좋아하면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고 해서 탈이 나기도 한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윤형, 최태섭, 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부모님의 맞벌이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방임주의 속에서 커왔다. 대신 어머니는 불안해서 그러셨는지 늘 입버릇처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인이 박인 탓일까, 나는 학창 시절 누구보다도 일탈을 경계했다. 물론 치마를 줄여 입고 머리를 기르는 등 소소한 일탈은 감행했지만, 가출과 반항처럼 범위가 큰 것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큰 일탈을 감행할 두둑한 배짱도 없었고, 책임감이라는 겪어보지 않은 단어가 무서웠다. 시간이라는 무게가 쌓여 배짱이 조금 생겨난 것인지 나는 부모님이 원한 편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었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허다했고, 조언을 빙자한 상사의 갖은 구박과 잔소리를 견뎠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했음에도 오랜 취업준비생 신분에서 탈출한 게 기뻤고, 남들과 달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꼈다. ‘용기 있다’ 는 주변의 칭찬도 어깨에 힘을 넣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업무의 강도와 나아지지 않는 상명하복 문화에, 남아 있던 열정마저 사라져 제발로 그곳을 걸어나왔다.
일이 고될수록, 먹고사는 게 힘들어질수록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채운다. 사회는 이에 쉽게 대답한다. ‘네가 원한 일이잖아.’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는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노동이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를 앗아가는지, 또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 실태는 어떤지 찬찬히 살피고 있다. 원래 ‘열정 노동’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어 오며, ‘오타쿠’ 혹은 ‘마니아’의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열정이란 이름으로 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지를 뜻하며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인다. ‘열정 노동’은 노동계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열정 노동의 본질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2) 그러므로 나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다. 3) 고로 나에겐 노동자의 권리가 필요 없다. 노동자의 권리를 인식하지 않는 열정 노동자들은 자신은 물론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근래에 유명한 디자이너 밑에서 최저 시급도 못 받으며 일하던 인턴 이야기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영화감독 지망생, 만화 문하생 등 ‘네가 원하는 일이니 책임져라’, ‘너 아니어도 하고 싶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는 말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며 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압박 면접’ ‘인신공격’ ‘사상 검증’ 등의 단계를 밟아 또 다른 희생자를 양산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보고, 듣고, 겪고 있다.
자본주의는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그 ‘꿈’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착취한다.
꿈은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 놓은 가장 잔인한 덫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도 ‘노동자’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 사는 것을 꿈꾸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중

문제는 ‘열정 부족’이 아니라 ‘잘못된 열정’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질 의무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노동 구조와 임금 등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졌을 때 성립되는 이야기다. 저자는 열정 착취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열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스스로 노동자임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해, 시대가 원하는 열정에 모순이 있음을 알고 관성적인 열정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역사가 단기간에 진보하지 않았듯 우리의 현실이 쉽게 바뀌리라 생각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권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식 변화에서 시작되어 널리 퍼지고 연대하여 쟁취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열정(熱情)’의 의미는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테다.